5장 하나. 기적의 향연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 시원하지?’
환청인가 싶었다. 뒤 베란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웬일인지 배시시 웃으면서 일어난 아이들. 오늘따라 반찬 투정도 하지 않고, 샤부샤부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신랑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따스한 포옹을 하고, 오늘 내 일정에 대해 ‘편안히 즐기라’는 말과 함께 출근했다. 모두가 나가고 난 후, 아주 잠깐 욕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이마 위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눈 밑의 옅은 주름과 기미가 노화의 수준을 말해 주었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이루어 낸 일상인가. 연출된 일상이 아닌, ‘진짜’라는 느낌이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향수처럼 번지는 것 같았다.
‘이만하면 괜찮다’
내겐 유달리 어려웠던 여름이었다. 좀 더 유쾌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건강한 마음으로 나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불쾌하다는 걸 내색했고, 저주받은 일상 같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꼭 툴툴거렸다. 아이 앞에서 많이도 싸웠고, 많이도 울었다. 내가 화냈던 수많은 날은 그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상황의 문제도, 환경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몰랐던 무지에서 비롯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내가 나를 모르면 그렇게 되었다. 그에게 변치 않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안도인 동시에 체념이 되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랑의 콩깍지는 진작에 나부터 벗겨진 것 아니겠는가. 『가족이라는 착각』(이호선 저)에서는 그랬다. 가족은 사랑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외로움만 남는 불행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동안 지독히 쓸쓸했고, 외로웠다. 가족을 내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으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가족은 내게 책임져야 할 의무였고,
보살핌의 대상이었으며, 엄마에게서 벗어나려 한 또 다른 틀이었다.
힘겹게 터득한 처세법을 실천하고 있음에도 자주 한계에 부딪혔다. 아마 처세를 익히고 실천하는 기간이 설익어서일 것이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마라(악마)의 유혹’이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미덥지 않아 했다. ‘네가 정말 변할 수 있을 것 같아? , ‘이렇게 하는데도 왜 그대로야?’ 하며 나를 힐난했다. 티끌만큼이라도 나아져야 하거늘, 내 수준은 한참 미달이었다. 쓸쓸하고 불행했던 내 과거를 보상받고야 말겠다는 듯, 끓어오르는 화는 모조리 가족들에게 전이시켰다.
습관(習慣). 특히, ‘관’ 자는 마치 내 마음까지 꼬챙이가 관통하여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모양새의 한자다. ‘고정된 마음’이라는 뜻이다. 한 번 꼬챙이가 끼워져서 고정되면 여간해선 바꾸기 힘들다는 뜻이리라. 한편으로는 무서운 이야기다. 유충이 성충이 되려고 온몸으로 증명하듯, 이제까지의 내 모습과 결별하기 위해 내 마음을 관통하고 있던 꼬챙이(고정된 마음)를 과감하게 뽑아냈다. 새로운 것으로 하나씩 갈아 끼우며 부대끼는 찌꺼기들, 기존 습관의 저항에서 나오는 고름은 새 습관의 살이 헌 상처를 아물게 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가까운 이들의 격려라고 믿었더랬다. 그러나 정작 가족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이마저 어색하고, 우습기만 할 뿐, ‘안 그랬잖아. 갑자기 왜 이래?’ 같은 반응은 이제 가장 강력한 장애물로 탈바꿈한다.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필수적인 과정과 혼란임을 알면서도 그 압력은 힘이 셌다.
어둠에 갇혔다고 두려워 하지 말자. 익숙해지면 나만의 별을 볼 수 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내듯 우직하게 실천해야 한다. 내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은 매우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이것이 오히려 가장 이타적인 행동임을 안다. 그들이 나를 불편해하는 모습이 서글프고, 쓰라렸다. 그러나 견뎌내야 한다.
그런 때가 바로 지금, 중년이다.
『나이 듦 수업』(고미숙 외 5명 공저)에서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게 가장 보람 있는 때란, 매일 어제보다 보람 차기 때문에 아마 죽는 날이지 싶다고. 그러니 죽는 거 너무 서글퍼할 필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 스스로 ‘이제는 적어도 나 스스로 이런저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겠다.’ 하고 느껴질 때가 온다고 말이다.
순간, 교수님이 책 속에서 튀어나와 내게 말하는 줄 알았다. 나는 마음으로 묻는다.
‘교수님, 그때가 지금일까요? 교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습관 들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 정말이지 잘못된 생각을 죄다 버리고서야 바른 생각이 든다는 것을, 이제야 통감합니다.’
인간의 열매가 지혜이고, 그 지혜가 내 안에 깃들려면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단다. 아쉬운 거 없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단다. 나는 주체적인 존재이되, 세상과 주변인들의 조화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중년에 잠시 쉬는 ‘인생 점검’이 향후 10년은 거뜬히 버티게 해 줄 동력이다.
그래서 지난여름이 그렇게 부대꼈나 보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면서 스스로 이 변화를 믿고 다독여가며, 역시나 얼룩덜룩한 성질이 군데군데 삐져나오더라도 부둥켜안고 일어서는 과정. 때로는 이유 없이 구역질이 났다. 어지러웠고, 기운이 빠졌다.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무너지기 아쉽다는 절박함이 차올랐다. 내 인습(因習)을 토해내며 뒷수습하면 할수록 간절함이 샘솟았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기를 수백 번. 되도록 잡념이 스며들지 않도록 움직였다. 자주 걸었다.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렸다. 수백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려던 노력의 보답이었을까.
뒤 베란다 창문에서 다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정도 했으니, 이제 마음 좀 편안해질 때도 됐다. 숨 고르고 다시 가야지.’
‘…네, 고맙습니다.’
이른 아침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참는다. 욕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다. 젊은 날에 아주 오만했고, 그렇게 원하던 기성세대 어른이 되어가면서 단단해졌다. 단단해지기 위해 여린 속내를 짓밟았던 때도 있었지. 그러나, 앞으로는 으스러져 가는 그 여린 속내를 다시 살려보겠다. 살뜰하게 보살피겠다. 오늘을 잊지 말아야지. 가을이 되고서야 그 여린 것이 드디어 싹을 틔우고, 건강한 웃음을 지어 보인 날 아닌가.
당신 안의 여린 싹을 지켜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단단함만 품지 말고, 여린 것도 거뜬히 품어내면서 아쉬울 것 없이 휘어져 보라고도 말하고 싶다.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 찬란하게 빛날 만한, 그럴 나이니까. 노년까지 갈 것 없이 지금부터라도 젊은 세대에게 내줄 지혜, 우리는 이미 듬뿍 가지고 있지 않은가. ‘꽤 괜찮은 하루’를 만끽하기까지 우회한 시간이 길었다.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숙성된 시간이 필요했던 ‘오늘’이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기적은 우연을 가장한다. 기적은 시끄럽지 않다.
당신도, 나도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낸다는 것. 그게 바로 기적의 향연이다.
“삶이란 결국 매일의 작은 기적들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