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다섯. 미래에 남을 가치
불교에는 ‘무아(無我)’라는 말이 있다.
나를 이루는 것은 갖가지 상념이 ‘나’라고 착각하게 만든 것일 뿐, 상념의 집합체인 마음이 나를 조작하여 이리저리 휘두른다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에서 비롯되고, 생각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기억은 본능적으로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오해와 갈등, 고통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집착하지 말아라. 내려놓아라. 이 세상에 진정한 ‘네 것’은 없다. 그래서 ‘무아’다.
부처님은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훌라’라고 말하며 출가했다. ‘라훌라’라는 말은 부처의 아들 이름이자 ‘속박’을 의미한다. 훗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을 때였다. 아들 라훌라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 제게 유산을 주세요.’라고 말하자, 부처님은 아들을 출가시킨다. 자신이 아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출가해서 얻은 깨달음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뭘까.’
나는 출가하지 못했다. 재가자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돌이킬 수 없는 ‘속박’을 세상의 축복이라 여기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길러 보니, 왜 ‘속박, 장애, 걸림돌’이라 불렀는지 알 것도 같다. 본능적으로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해야 하고, 때로는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와 아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도 한다. 그 유명한 집착이다. 이 세상에 진정한 내 것이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것인 양해서는 안 될 것들을 마구 만들어 주워 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는 미래를 가져다 쓰고 있다』(윌리엄 맥어스킬 저)에 의하면, ‘장기주의(longtermism)’라는 철학적 개념이 나온다. 단순히 먼 미래가 아니다. 우리의 현재 선택이 몇 세대에 걸친 수백, 수천 후의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깊이 고민하면서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지 말자. 사실, 노예 폐지부터, 자유니, 인권이니, 다양성 존중과 같은 시대적 변화의 혜택을 누려야 할 세대는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저자는 현대인의 모습을 ‘10대가 심야에 모퉁이를 운전하며 달리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기후 변화, 빈민 구제, 인공지능, 핵무기 위협을 장기주의로 바라보자면, 당장 지금부터 해야 할 것도 많단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도덕적 책임의 중요성은 알겠으나, 그 실천법이 대규모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형태라니. 심지어 그것이 감정에 근거한 이타주의적 선행보다 ‘효율적’이라니.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며 승산 있는 게임을 하자는 것처럼 들렸다. 선뜻 내키지 않는 결론이었다. 적어도 철학 책이라면, 그런 체험적 신뢰 경험을 쌓기 이전에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나기가 얼마나 모순인지부터 짚어줘야 하지 않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강상중 저)을 보자. 이 책에서는 일본의 엽기적인 살인 사건부터 IS 등에 이르는 ‘우리 안의 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한 우리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걸 고려해 봄 직하다며, 일련의 사건들은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자아와 세상의 골을 메우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공허함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게다가 그 골은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화’가 가장 큰 원인이란다. 옳거니.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발아하지 못한 ‘악의 씨앗’을 품었다는 뜻이구나.
카프카의 『변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전락』을 보면 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개인의 역학 관계를 정조준했다. 자아와 세상이 단절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그러고 보니, 모든 작품의 주인공은 ‘나를 사랑할 힘’을 잃는다. 점점 나를 혐오하게 되며, 그렇게 만든 사회적 압박에 못 견디는 지경에 이른다. 무기력해지거나, 소외되거나. 존재의 위기다. 작품 속 모든 주인공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자꾸 창의성을 발휘하라면서도 수직적인 사무실 분위기에서 ‘나대지 마라’고 한다. 아이디어를 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 개성 추구한다면서 심혈을 기울여 산 옷도 알고 보면 다 고만고만한 유행 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내가 생각한 개성이 진짜 개성인지 그저 최신 유행에 편입한 건지 모르겠다. 『개인주의를 권하다』(이진우 저)에서는 말한다. 자아실현은 적당한 억압(외부 환경)을 승화시켰을 때 해방되는 거라는데, 외부환경의 속도가 이미 한도 초과다. 고장 난 시계처럼 미친 듯이 돌아간다. 짤막한 영상이 넘쳐나고, SNS에서사진 업로드와 카드 뉴스가 수시로 바뀐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내 자아 역할을 카멜레온처럼 다방면으로 연출하는 데에도 기운이 달린다. 이미 과부하인데, 여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아 정체성까지 수시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는 저주까지 받았다. 기계가 아닌 인간은 고통스럽다. ‘에러 발생’이라며 기계처럼 폭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자아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유지하기란 모순에 가깝다. 장기주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기부 실천이 심리적으로 힘든 이유다.
이 시대에 발맞추어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극기 훈련과 같다. 그래서 힘껏 비틀거리는 중이다. 그러나 빨라지는 세상은 나를 병들게 할지언정, 불변의 가치는 느린 속도와 따뜻한 온도로 내 곁에 남았다. 어쩌면 그것은 버거운 날에 동료가 챙겨 주는 커피 한 잔이며, 문자 한 통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것은 아이들이 내게 책 읽어주는 소리였으며, 까르르하는 웃음소리였다. 화창한 하늘에 구름 한 점이었고,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의 따스한 미소였다. 나로 인한 듯 보였지만, 내가 아닌 것들로부터였다. 잊어서는 안 되는 감각이다.
거대한 미래 안에 ‘내 좋은 과거’가 녹아든다.
이제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내 아이들에게 부모 세대로서 바라는 일.
그것은 더 빠르게 돌아갈 미래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지니고 살아가는 능력이다. 잘 존재했으면 한다. 자아와 세상이 그런대로 연결되어 있어서 ‘민폐형 개인주의자’가 아닌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로 세상을 이해했으면 한다. 그러면 자유와 책임은 자연히 터득하게 되겠지.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게 살지도 모르겠다. 가끔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사랑의 완성은 그리움’이라고 하지 않던가.
휴머노이드 로봇이 차세대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는 날이 오더라도, 한 번 더 호된 팬데믹을 마주해서 또다시 살아남더라도, 그것은 백 년 전, 천 년 전에도 변치 않았던 인류의 믿음과 사랑의 대물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엄마 역시 비틀거리며 깨달았다는 것과 함께.
네가 나를 떠올리는 그 순간에 내가 없더라도 상관없다.
‘네가 스스로 사랑할 능력이 있고, 세상과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 건재하다면 됐다.’
“인간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세상을 조금씩 나아지게 한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