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②

4장 넷. 죽음을 두려움 없이 응시하기

by 스쿠피

“엄마, 괜찮아?”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이면, 가족들 대하기가 조심스럽다. 막 대하던 잔소리도 잠잠해지고, 나도 모르게 멍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이 동료이든, 제자이든, 친인척이든. 죽음 자체가 내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마땅하건만, 죽은 그 사람이 보내고 간 인생은 어떤 것이었나 하고 생각에 잠기게 되는 일, 당신은 없는가.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면 ‘존재’에 관한 고민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 남을까’가 아닌 ‘어떻게 살았나’가 더 중요한가. 그렇다면 죽음을 초월한 존재, 즉, 삶이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받아들이는 편이라 보면 된다. 내가 죽어도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한, 시간마저 뛰어넘을 수 있다니. 갑자기 어느 중국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죽은 사람이 너무 그리워서 네가 그 사람 이름을 부르거나 그 사람 이야기를 자주 하면, 그 영혼은 죽은 게 아니야. 다시 그 순간에 소환되어서 너와 함께 있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영생’ 아닌가.


문제는 누가 내 인생을 기억해 줄 것이며, 어떤 의미로 회자하느냐다. 혹시 당신이 책을 좋아한다면 묻고 싶다.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는가. 살아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미 이 세상을 뜬 사람인가. 그 사람을 품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 내 인생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가. 깊은 우울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뼈 때리는 충격요법으로 현실 감각을 되살려준 은인일 수도 있다. 책을 읽고 나서도 소위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꺼내 들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그는 정말 죽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살아 숨 쉬듯 내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지 않은가.


어디 책뿐이겠는가. 음악도, 영화도, 스포츠도, 기술도 다 마찬가지인 것을. 취향의 문제고 성격의 문제다. 세상에는 수많은 취향과 성격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 하나 죽는데, 단 한 명 정도 기억해 주는 사람 없을까 싶겠지만, 안일하고 안일하다.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잊지 못할 사람으로 두고두고 회자하는 인생이란, 결국 시간을 넘어선 흔적을 남긴 존재다.


뭔가를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저히 흘려넘길 수 없는 영혼의 울림과 말, 행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렸을 것이다. 쓰거나 새겼을 것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주변 친지들이나 가족들의 죽음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때면 종종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죽음 자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기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에는 편하게 죽음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시간이니 존재니 하는 이야기가 영 불편한가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하는 눈빛을 보면.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저)에 의하면, 죽음을 무슨 거대한 미스터리인 것처럼 두려워하고, 일련의 죽음 신념 체제에 어떤 합리성도 따져보지 않은 채 위협적인 것으로 대하는 게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일축한다. 누구나 죽는데, 알고 보면 생각보다 그 죽음이 가까우니 죽음을 잘 파악하고 있을수록 역설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요지다. 그런데 죽음을 제대로 알려고 하기는커녕 잘못된 신념 체계를 왜 의심도 안 해 보고 떨고 있냐 한다.


‘왜 떠냐고? 죽어 봤어야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살아있는 동안은 안 하려는 게 내가 봐 온 사람들이었거든.’


오랜 세월 세뇌된 신념은 그래서 무섭다. 일종의 굴레이기도 한 사고 체계를 어떻게 개개인 스스로 깨부수고 객관적으로 인지한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셸리 케이건과 같은 철학자는 대단히 용기 있고 지적인 사람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게 됐는지를 조목조목 따져보고 베일에 싸인 의문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깊은 두려움을 차분하게 걷어낸다. 영혼을 믿지 않는 철학자답게 죽으면 모든 게 없어진다고 차갑게 말하는 그지만, 살아있다고 해서 모든 이가 축복 속에 사는 건 아니며, 때에 따라서는 포기하는 게 답일 수도 있다는 문구에서는 인간미마저 느껴졌다.


‘죽더라도 죽음에 대한 환상(두려움)은 걷어내고 죽자’라니.

그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도 죽을 거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조언은 깊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영생 자체는 추구하고 싶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저주다. 40년 넘게 살아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산다는 게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깔끔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널린 게 고통이다. 하지만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 삶의 목표이자 소명으로 삼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 있음’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단다. 알 만큼 알았으니, 이제는 좀 더 전략적으로 유한한 삶을 재구성해도 되지 않을까. 셸리 케이건은 이렇게 권한다.


‘행복한 삶의 양과 질을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을 선택하라.’


그래서 자기 계발서를 읽어도 함부로 내 생활 패턴을 다 갈아엎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매뉴얼대로 하는 목표 달성만으로 ‘나 잘살고 있네’라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목표치는 살짝 높게 잡되, ‘내 고유의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삶의 양이 과할 때면 신호가 온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무기력해진다. 실수가 잦다. 숙면이 힘들다. 그럴 때면, 삶의 질을 위해 시간을 낸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한다.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경험을 늘린다. 스스로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껴본다. 이후,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슬아슬한 저울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일상이어도 내가 어디쯤인지는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그래야 다시 멈춰야 할 구간, 달려야 할 구간이 선명해진다.

100세까지 살고 싶은가. 왜 200세까지 살고 싶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가. 삶은 유한하다. 영생 자체에 대한 욕심은 버리자. 대신 시간을 넘어선 흔적으로 영생을 대신하는 건 어떤가. 삶의 양은 당신이 얼마든지 조절하면 된다. 삶의 질은 사랑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아니겠나. 당신에게 주어진 환경, 상황, 의미를 더해 ‘살아있는 한’ 좋은 직장인이고, 좋은 부모이고, 좋은 사람이면 된다. 쉽지 않다는 거 안다. 나도 여전히 힘들지만, 당신도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용기를 내어, 깊은 슬픔에서는 벗어나자.

“엄마, 괜찮아?”


“응. 사실은 엄마 친구가 갑자기 죽었대. 이제는 그 친구랑 이야기도 할 수 없고, 만날 수도 없게 되었어.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는데. 정말 열심히 살았던, 훌륭한 친구였거든. 안타까워서 계속 눈물이 나. 잠도 잘 안 와. 그래서 그래. 이제 엄마 마음에서 조금씩 천천히 보내주려고.”


친구의 죽음이 납득이 되지 않아 일주일 동안 불면에 시달렸다.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하자, 아이는 고개를 신중하게 끄덕였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그녀도 흐뭇했으면 한다.

“내가 죽거든, 나를 기억해 주되,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말아라.”

-크리스티나 로세티〈Remember>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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