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셋. 죽음을 배울 준비
내 출생에 대해 내가 준비할 건 없었다. 그러나 내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급성 암세포가 갑자기 멈추는 행운을 겪은 아버지였지만, 막상 죽는 그 순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 봤을 때,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이 지독했다는 걸 인정한다.
“아버지, 또 올게요. 저 가요~”
“걱정 말고, 니는 니 일이나 해라.”
그 정도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상태였는데. 그깟 일이 뭐라고. 며칠 휴가 내고 아빠 곁에 있을 생각조차 못 했다. 내 아버지 이야기를, 아버지 친구분에게서 소상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분은 아버지의 연락처를 잃어버린 후, 뒤늦게 아버지 사망 소식을 듣고 수소문해서 화장터 입구까지 찾아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8절지 흰 종이에 아버지 이름 석 자를 크게 써서 들고 우시며,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지 알아야 한다, 정말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이렇게 간다 하시며 오열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열렬한 애도에 나도 모르게 얼마나 울었던지.
생각보다 나는 아버지 인생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가장 후회되는 게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조문객이 예상을 뛰어넘는 장례식이었다. 문득, 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무시하곤 했던 내가 생각났다. 한없이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놀랍게도 아버지와의 ‘의미 있는 추억’이 풍요롭지 않다는 생각, 살아가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던 순간은 손가락을 꼽는 수준이구나 싶었을 때의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의 꼬리는 자연스럽게 홀로 남은 엄마의 죽음까지 연상하게 했다.
‘죽음이 이런 건가. 이렇게 가까운 사람부터 차근차근 떠나는 과정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의 의미를 헤아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가꾸라는 건가.’
생각하는 것도 습관이다. 유한한 목숨을 지니고 태어나 언젠가는 나도 그들 따라 죽는다는 사실에 왜 이리 둔감했던가. 수많은 고전에서 피를 토해내듯, 죽음도 배울 수 있고 조금만 노력하면 공포나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대면할 수 있음을 설파하는 스토리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죽은 자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죽어보니 어떠냐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냐고. 아니면 정말 그곳에 다른 세계가 있는 거냐고. ‘사후생(死後生)’이라는 게 있다면, 거긴 있을 만하냐고.
여기 인도계 미국인 2세 남자아이가 있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고전 명작을 섭렵하며 언어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가졌다. 명석하게 자란 아이는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 후, 심리학 전공 여자 친구에게서 ‘정신은 뇌의 작용일 뿐’이라는 소설 한 권을 빌려 읽게 된다. 문학은 인간의 의미를 풍요롭게 전하고 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체 기관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생물학과 신경외과 강의도 들어보기로 한다. 한동안 청년은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지점 어딘가에서 인간의 진의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과학의 역사 및 철학’ 강의에서 청년은 깨달았다. 삶과 죽음에 대해 도덕적 견해를 내세우려면 그에 관한 직접적인 경험 없이는 진정한 고찰이 어렵다는 것을.
청년은 그 길로,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 의대에 입학했다. 주로 뇌를 다루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직업이 아닌 소명이라 생각했다. 혹독했던 레지던트 6년 차. 이제 곧 커리어의 정점에 이르러 명문 대학 곳곳에서 신경외과 교수 자리 이야기가 나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폐암 말기이며, 폐와 뼈에 이미 암세포가 전이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최고의 의사가 폐암 말기 환자가 되는 순간이다.
소설이 아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티니 저)는 실화이며, 문학도이자 의학자가 끝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의미를 탐구하려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의대생들의 죽음 필독서 『죽음과 죽어감』(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저)처럼 환자들의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그대로 거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이해는 된다. 혹자는 5단계고 뭐고 한데 엉켜 뒤죽박죽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다시 거꾸로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폴 칼라티니는 후자였다. 그는 자신이 의사였기에 단박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분석하고 약을 처방할 정도다!), 생각보다 그렇게 빨리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우울해했다.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줄어들었는데, 담당 의사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으란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만약 단 하루만 남았다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하며 의미를 추구한단 말인가.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죽음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아무것도 확실치 않다면, 차라리 오래 살 수 있다고 가정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을 남기며.
갑작스러운 사고는 있어도 갑작스러운 병은 없다. 내가 나이 들어 그저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축복받을 일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나 엄마처럼, 혹은 저자처럼 병환으로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폴 칼리티니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되 의연하게 일상에 임해 교수자격을 취득했고, 체외수정으로 예쁜 딸아이도 얻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암은 재발하여 수료식에 불참하고 딸아이와 헤어졌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본인 스스로 후회 없이 준비한 죽음이었으므로. 게다가 덜 완성한 원고에 사려 깊은 아내의 에필로그로 메꾸어진 책이다. 삶만큼이나 아름다운 죽음 아닌가.
아내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암 치료를 기다리거나 병원에서 일하는 중에도 틈틈이 은색 노트북을 끼고 글을 썼다고 한다. 본인의 사후,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인 준비를 최대한 신경 썼고, 임종 직전에 모르핀 주사를 맞을 때도 ‘준비되었다’고 스스로 말할 줄 알았다. 놀라울 만큼 성숙하고 침착한 태도. 그의 글은 그가 살아 낸 시간보다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르겠다.
‘존엄한 죽음이란 이런 거구나.’
의사들은 죄다 유물론자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환자 앞에서 또박또박 치료 가능한 방법만을 열거하고, 세부적으로 나뉜 의과에 따라 이리저리 환자를 보내어 처방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일이 그들의 사무려니 했다. 온정어린 말투나 암 투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의사보다 오히려 간호사나 선임 수술 환자들 아니던가.
그런데『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정현채 저)에서는 실제로 저자가 죽음학 강의를 했을 때, 절반은 공학자나 과학자라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밀접한 경험을 많이 겪었기에 관련 지식도 꽤 깊더라는 것이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영적인 부분도 가시화시킬 수 없을까. 의사들도 희망이 필요한 사람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의외로 이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는 수많은 생의 끝을 부여잡고 최선을 다 해 보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진심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생리학적으로 죽었으나 그 너머의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현상 앞에서 과학은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을 품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들은 생과 사의 최전방에 선 ‘산증인’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남긴 글에서 존엄한 죽음의 더 많은 사례와 경험을 접한다. 그러면 이상하게 겸허한 기분이 든다. 환자의 마지막을 차갑게 지켜보면서도 괴로운 마음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모습은 극기(克己)의 상징 시시포스를 연상케 했다. 폴 칼라티니는 의사이기 이전에 문학도였고, 신앙심이 깊어 목사가 되려고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 역시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에서는 영적인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제 최전방에 선 그들의 자료와 경험을 지팡이 삼고자 한다.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죽음에도 귀 기울여야겠다. 내 죽음도 숱한 생명체가 겪는 과정 중 하나임을 이해했다면 준비는 끝났다.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었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숨결이 바람 될 때』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