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하나. 암보다 지독한 것
“80살까지는 살아봐야 안 되겠나. 느그들이 신경 써 준 덕에 이래 더 살고 있다. 고맙다.”
7년 전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시장 칼국수를 사 먹고 친정에서 자던 그날이었다. 아버지는 밤잠을 설치며 버둥거리셨다. 동네 병원에서 조금 더 큰 병원으로,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옮기고 나니, 새벽 4시였다.
갓난아이와 함께 차에서 밤새운 그날, 아버지가 심상치 않다는 내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아버지는 급성 전립선암이었다. 6개월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무슨 연유인지 예상보다 3년은 더 살다 돌아가셨다. 의사가 말하길, “어르신, 축하합니다. 급성으로 전이되던 암세포가 갑자기 멈췄어요.” 하더란다. 아마 아버지 몸속에서 돌연변이 반응으로 급성 암세포가 생겼듯, 항암 치료 일부가 아빠 몸속에서 각별하게 반응하여 ‘작은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을까. 80살까지는 살아 보고 싶어 했던 아버지. 자식들이 신경 써 줘서 더 오래 산다며 손수 감사 전화를 돌리셨던 아버지는 80세 생일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처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족들은 죽음의 유예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단톡방을 만들고 각종 정보를 공유했다. 엄마의 유방암은 그 와중에 발견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단톡방에는 엄마의 유방암에 대한 정보도 더해졌다. 한쪽 가슴을 절단하는 수술을 감행하여 암세포를 깨끗이 제거했다고 여겼건만, 몇몇 암세포는 끈질기게 엄마 몸속에서 살아남았나 보다.
그로부터 2년 후, 엄마는 나머지 한쪽 가슴도 제거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한동안 각종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까지 해내느라 머리카락은 다 빠졌다가, 다시 새하얗게 났다가, 지금은 온몸의 기운이 빠진 채로 한쪽 다리 관절염 통증까지 겪으며 홀로 지내시는 중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별말이 없었다며 지금도 아쉬움이 많다. 당신의 올해가 돌아가신 아버지 나이에 들어섰음을 곱씹으며, 겨우 ‘죽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할 마음을 내비치곤 한다. 그동안 많이 외로웠으리라. 지금 엄마에게 암보다 더 치명적인 건, 외로움이다.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난 후, 미운 정으로 그렇게 지긋지긋해하던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극한의 외로움. 엄마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스스로 인지하게 된 당신 자신의 병로와 정신적 고단함을 마주하기 힘들어했다. 아버지 따라가고 싶다며 누구든 만나면 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때로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로, 초조 불안 증세로, 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번 통화할 때마다 3시간씩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곤욕스러운 일은 죽음을 담보로 무기한 이어졌다.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나는 매몰차게 엄마와 ‘거리 두기’를 선언했다. 속된 말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은 못된 년이다.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공저), 그게 나였다. 셋째였던 나는 언니들보다 상대적으로 엄마의 통제권 밖에서 자라 여백이 있었고, 그 틈을 누리며 살았다. 나로서는, 엄마의 반응에 정성껏 호응하려면 내 인생을 일부 ‘죽여야만’ 가능할 것 같았다. 엄마와 통화하거나 만나고 나면 그 우울한 기운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일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오랜 세월 습관화한 엄마의 침습적인 언행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지키는 행동으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았다. 엄마 말을 아무리 많이 들어주어도,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엄마의 심리적인 과제’는 엄마의 몫 아닌가. 내가 이상한 자식인가. 엄마는 엄마라서 그럴 수 있는 거고, 나는 자식이라서 이래서는 안 되는가.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의 일이다. 효녀 짓해보겠다고 들어놓았던 암 보험금을 드렸더랬다. (결혼 후, 암 보험 전환으로 컨설팅받지 않았더라면, 30년 만기로 납입해야 하는 연금 수준급 보험이다) 씁쓸하게도 그 시점에는 엄마와 내가 극도로 예민했던 때였다. 보험금 건이 아니었더라면, 굳이 친정에 가지도 않았을 발걸음. 내 통장 내가 받아오는데도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 내 인생을 건 이상한 비장함과 서글픔이 뒤범벅되어 20년 넘게 돈을 벌어 왔으면서도 징글징글했다. 돈이 다가 아니라지만, 엄마 노후를 위해 암 보험까지 알뜰살뜰 들어놓았던 내 마음, 그 여유까지 함께 일그러진 게 속상했다. 드라마는 드라마다. 따스한 대화가 오가고 훈훈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모녀 장면은 판타지에 불과했다.
한동안 ‘효도’나 ‘자식 된 도리’라는 말이 싫었다. 자식도 부모를 혐오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진짜 내 생각대로, 내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 볼 기회조차 사라진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유의 문구에도 실소했다. 바꿀 수 없는 게 가족이어도 상호보완을 하지 않는다면 굴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죽이기 싫었다. 나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를 몸과 마음으로부터 매몰차게 격리하면서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서서히 조심스럽게 길들어졌다.
“우리 셋째딸, 사랑해~ 한 번 안아보자.”
얼마 전, 엄마가 내게 말하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어색하게 웃으며 껴안은 뒤, 물었다. 웬 사랑이냐고.
“몰라. 나도 어색한데 함 해본다 아이가. 내가 인자 살면 얼마나 살겠노. 죽을 때가 다 되 가이 사랑한다 소리도 잘 안 나온다마는, 함 해보고나 죽어 볼라꼬. 헤헤.”
엄마가 방긋 웃는다. 지난 7년간의 골 깊은 일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암 수술 이후에도 쌍심지 켜고 서로를 노려봤던 기억, 화해하자고 여행 가서 언성 높이다 엄마를 놔두고 와버린 기억,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혼자 병치레한 기억, 늘 마음 한 편이 체한 듯 뭔가 맺힌 듯 스스로 상처를 도려내고 소독하며 글로 토해냈던 수많은 새벽녘까지.
언니들은 요즘도 친정 갈 때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할 것이다. 요즘 엄마가 기분이 말이 아니더라, 오늘은 웬일로 엄마가 기분이 또 좋아 보이더라, 누가 엄마한테 좀 가 봐, 다들 바쁠 때라 정신이 없네, 요즘 좀 기운이 달리는 거 같던데 어디 나들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 등등. 나는 언니들에게 엄마의 근황을 들으며 스스로 위로한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언니들은 해내는구나. 언니들이 못했던 것을 내가 해보고 있구나. 엄마의 유방암은 무섭지 않은데, 엄마의 외로움 병이 지독하게 무서운 거구나.
‘죽음은 이렇게 서서히 스며들 듯 그 실체를 드러내기도 하는구나.’
엄마의 외로움 병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이 관건이었다. 곧 겪게 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직은 때가 아니려니 되뇌며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려는 마음, 그저 무료한 시간을 견뎌내는 인내심. 머리로는 알지만, 엄마를 만날 때마다 괜히 씩씩한 척, 가벼운 척, 힘든 척했다. 그러지 않으면 물 먹는 하마처럼 ‘엄마의 우울감’이라는 하마에게 나까지 잡아먹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집에서 염불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기록해 둬야겠다며 시장통에서 만년필 한 통을 사 오기도 했다. 어쩌다 전화해서 뭐 하냐 물으면 컴퓨터로 게임하고 있단다. 하루 종일 밥 먹는 게 귀찮아서 굶었다며 운다.
‘엄마 나름대로 늦었지만,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구나.’
나는 못된 딸이다. 그래도 괜찮다. 늘 그랬듯 당당하게 잔소리한다. 왜 스스로 보듬지 못하냐고, 바나나 한 조각이라도 예쁘게 챙겨 먹어 보라고 쏘아붙인다. 침대 옆에 생수라도 벌컥거리며 마실 줄 알았으면 좋겠다. 못된 딸과 착한 딸의 경계선. 내가 엄마를 찾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엄마랑 같이 있는 동안만큼은 싸우더라도 덜 외로울 테니까. 시끄럽고 말 많아도, 따가운 소리 막 해대도 엄마는 그걸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 앞에 있는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 안에 있는 친구다.“
-1922, 카프카의 일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