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라는 철학

3장 일곱. 웃을 수 있다면 살만한 거다.

by 스쿠피

“그만 말해. 후…그만 말하라고 했지! …그만하라고!!! 좀!!!”


아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나이 든 부모는 그 모습이 한편으로 이해되면서도 못내 힘에 부친다. 떼를 쓰는 것도 발달 단계에 딱 맞고, 어른들의 말을 듣는 척하는 것도, 기억 안 나는 척하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다. 귀엽게 보고 웃어넘기면 될 일이라지만, 족히 수백 번은 넘는 도끼질이다. 안 당해본 사람이 함부로 웃으라고 할 수 있을까. 참다 참다 짜증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오늘도 마주한다.


한때는 줄곧 내가 이상한 거다, 아직 까칠하고 예민한 내 기질이 이렇게라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겠지, 내 안에 서러움과 화는 왜 이리 한결같은가, 했더랬다. 인생은 무상(無常)이라더니, 예뻐하던 시절은 유효기간이 다 된 건가. 내 자식이지만 밉다. 싫다. 체력이 달려서 누를 기운도 없다. 그나저나 이미 아이 앞에 엎질러진 내 성질, 어떡하나.


“음~전에도 얘기했었는데, 욕심쟁이 우.후.후.~~”


순간, 어린 시절 ‘욕심쟁이 우후후’라는 후렴구가 들어간 노래를 흉내 냈다. 손동작은 권총 방아쇠 모양. ‘우후후’라는 부분에서 얼굴을 향한 손가락을 하늘로 추어 올리며 총구 연기를 여유롭게 불어대는 척했다. 너희들이 알려나. ‘심신’이라는 가수가 ‘가요톱10’이라는 주말 방송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그때를.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까지 버럭버럭하던 엄마가, 생전 처음 보는 위협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살짝 충격받은 듯했지만, 이내 방긋 웃으며 눈빛을 반짝였다. 제발, 3초 전 성질내던 부분은 기억 속에서 잘라주렴. 대신 1초 전 했던 웃긴 행동만 기억해 줘.


“와! 엄마 그거 웃긴다. 근데 게임은 왜 안돼? 어? 왜 안 되느냐고~~”


재장전할 타이밍이다. 떼를 써도 한껏 누그러진 상태이니 한 번 더 해볼까.


“I said no, no, no~”


크으. 교육적 자존심이고 뭐고 없다. 이번엔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가 약물치료를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전설의 노래 ‘Rehab’이다. ‘노노노’라고 할 때는 꼭 손가락을 까딱거려 줘야 한다. 어떠냐, 요 녀석들아. 21세기 최고 쏘울 디바의 가짜 버전이닷!


초등 저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먹히는 방법이다. 아이들이 여지없이 떼쓰기 시작할 때면, 저 두 가지 어록과 제스처로 여유 있게 상황을 다스린다. 아직 도대체 내가 무엇을 흉내 내는 건지 궁금해하면서도 정확히 모르는 눈치다. X세대 엄마만의 세계에서 적당한 가공을 거쳐 소화한 포스만이 유일한 힌트라면 힌트겠다.


‘유머 있다’는 말보다 ‘진지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남들을 웃길 만한 마스크도 아니다. 유행어에 민감한 편도 아니다. 그저 간간이 내 상황에 맞추어 블랙 유머를 던지는 정도인데, 그걸 재밌다고 말해 주는 부류가 있었다고나 할까. 빵 터지면서 웃을 수 있다는 건, 상대의 유머 코드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남 얘기 듣고 웃을 일이 없다. 넘쳐흐르는 콘텐츠 중에서도 내 상황과 밀접한 것을 선별하는 과정이 지루해졌다. 애써 고른 콘텐츠여도 짜인 틀에 이입하지 못하면 챙겨 보기도 힘들다. 번거로운 사전 작업 없이 즉석에서 빵 터지는 유머를 만난다는 건, ‘풍요 속의 빈곤’처럼 매우 진귀한 일이 되어 버렸다.


『유머니즘』(김찬호 저)에 의하면, 유머도 놀이의 한 범주라고 한다. 그 기원에 대한 기록을 거슬러 보면, 17세기 말에서 18세기로 들어가는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미 커피 하우스와 클럽이 번성했다나. 특히, 기존의 엄격한 귀족 문화 대비 부르주아 특유의 사교성 있는 화법에 대한 담론이 유행하면서 도시 사회조직의 변화를 이끌었다. 지적인 농담과 재치 있는 화법 구사가 지금껏 리더십의 자질로 여겨지는 이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배꼽 잡고 웃을 만큼 재밌는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 유머의 내용과 인격의 눈높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 감각이 탁월한데 유머 센스까지 장착한 리더는 왠지 요령껏 일하는 처세와 맞물린 부분도 있어 보였다. 말하자면, 유머에도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유머의 기술이나 감각에 대한 패턴을 나열한 책들은 흘러넘친다. 반복, 풍자, 과장, 비유, 모방 등등. 무턱대고 리더십의 자질을 길러 보겠다고 매뉴얼 따라 하듯 노력하면 유머 감각도 나아질까. 심지어 이렇게 익힌 유머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면 좋다는 지나치게 섬세한 설명을 보면, 의구심마저 든다. ‘유머 감각도 학습해야 해?’ 라는.


실제로 인공지능조차 인간의 유머 감각만큼은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챗봇에 물어보시라. ‘측정하려고 시도 중’이라고 쿨하게 인정한다) 그렇겠지. 유머 감각만큼은 공식이 통하지 않는 법이니까. 경험상, 같은 유머를 해도 ‘느낌 다르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개그나 유머는 일상에서 묻어나는 진솔한 깨달음에 있다. 늘 진지했던 사람이 오랜 상념을 한 마디로 툭 뱉어 내었을 때,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장악한다는 건 그 사람 스스로 터득한 지혜다. 그리고 그 지혜가 고급스러울수록 극도의 긴장을 없애주거나, 깊은 슬픔을 가볍게 만들어 버리거나, 지리멸렬한 순간을 반짝거리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리라.


‘세탁기 좀 돌리라’는 얘기에 진짜 세탁기를 붙들고 한 바퀴 돌리려는 신랑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육아에 찌들어 말할 기운도 없을 때 이런 유머를 들으면 어이없어하면서도 각자 할 말 많을 것이다. 베트남계 미국인 이민 2세인 앨리 웡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어떤가. 미국 다우존스 주가지수도 저 모양인데 내가 흥분할 일이 뭐가 있겠냐면서도 남편 아닌 사람과 바람피우고 싶단다. 그러면서도 결혼 당시 남편은 자신을 저점 매수했으므로 지금 매도하는 건 큰 손실이라는, 특유의 위트를 선보였다. 이런 쇼가 전 세계에서 박수갈채를 받는다는 건 매우 의미심장한 일 아닌가. 단순히 웃자고 꺼낸 얘기 치고는, 내용이 깊다.


얼마 전, 절친한 지인과 통화했을 때의 일이다.

“언니, 저 좋은 소식 있어요!”


“왜, 이혼했어?”


순간 빵 터졌다. 마치 ‘이혼했어?’라는 어감이 ‘연애 시작했어?’라는 어감과 똑같았으므로.


“아니요, 진짜 이혼은 바빠서 못 해 먹겠고요, 대신 진작에 이혼했다 상상하고 지냈더니 웬 남자가 음식물 쓰레기도 비워주고, 한 번씩 청소도 해 주고, 가끔 아메리카노까지 사다 주더라고요.”


태생적으로 밝은 에너지에다 유머러스한 언니는 그제야 깔깔거리며 말했다.

“오, 나도 이혼하고 싶다. 크크.”


그리고 이어지는 안부 이야기 속에서 언니가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 간병을 하느라 몸이 많이 상했다는 것, 금지옥엽으로 키운 귀한 딸이 우연한 사고로 중환자실에 실려 왔을 때 잠깐 실신했었다는 것,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미친 듯이 간병한 결과, 죽을 뻔했던 딸아이가 곧 퇴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설레게 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이 상황을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벅차했더랬다.


웃기면, 그저 웃으면 된다.

슬퍼도, 다시 웃을 수 있으면 괜찮은 거다.

그것도 안 되면, 웃음을 찾아라.

찾아서라도 웃을 수 있다면 진짜 슬픔은 극복한 것이다.


당신의 고단함이 개그로 '승화'될 수 있기를, 당신의 깊은 슬픔이 유머를 만나 '철학'이 될 수 있기를,

당신만의 유머 코드가 당신 자체가 되어 진정한 '해방'을 느끼는 날들이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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