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녀온 제주. 나는 사라봉이라는 작은 오름을 올랐다. 그다지 높지 않은 오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초라한 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수평선이 보였다. 안개가 없었다면 티 없이 선명할 수평선이었다. 다가가 보면 반복되는 파도들일지라도. 며칠 전 크게 다툰 부모가 생각났다. 내 기억이 시작하는 곳부터 존재하는 그들의 수많은 파도.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 희미한 수평선이 꼴 보기도 싫어졌다. 어느새 엄마는 나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나, 우울증일까?’ 나는 무심하게 답한다. ‘응.’
난 늘 할 말이 없었다. 마치 불규칙적인 파도 아래 깊은 곳, 안정적으로 유영하는 고래처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하지만 엄마의 붉은 눈시울이 부쩍 자주 눈에 들어왔다. 아니, 늘 붉던 것이 이제 내 눈에 보이는 것일지도. 깊게 다문 입을 열어보고자 했다. 주제넘은 짓이겠거니 했지만. ‘엄마, 바라지 마. 기대 걸지 마. 포기 해. 엄마를 위해 그렇게 해.’ 엄마는 공허한 눈으로 말한다. ‘나는 버림받은 거야.’ 아빠의 경멸스러운 눈초리에도 꿋꿋이 성경이 든 가방을 들고 교회를 가 그녀의 아버지께 아빠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최 집사 답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마음이 진심으로 아팠다. 엄마는 나의 권유로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그녀의 무너짐으로 나는 위로를 얻었다. 그녀에게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안도를 얻었다. 그녀를 이해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당신에게서는 한 마디 없었다.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니.’ 정적만이 들기는 전화기 너머. 그 불편한 공기가 익숙해진 내가 밉다. 울음을 짜내어 보는 내가 우습다. 그 정신과는 내가 5년 다닌 정신과이다. 만성 우울증을 앓던 나는 어느 날부터 내 뺨을 내려치기 시작했고, 그 뺨이 아려오기 시작해도 가지 않던 병원, 나는 내가 번 돈을 손에 쥐자 발걸음을 뗐다. 사실 가끔은 내가 우울증인지, 우울증이 있는 척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일 잠들기 30분 전에 먹는 그 약을 먹어도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병원을 가고, 진료를 받고, 약을 타고, 먹는다. 뺨을 내려치던 내 행동과 다를 게 무엇일까. 당신에게 나의 우울증을 털어놓은 것을 후회한다. 나의 무너짐은 당신에게 위로였으리라 예감한다. ‘우리 가정이 화목하게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자.’ 엄마는 말한다. 어젯밤 더운 공기를 피해 열어둔 방문 틈으로 들리는 부모의 속닥이는 소리. 담담하고 고요하던 그 소리. 그녀는 웃는다.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내게 기다리라 한다.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한다. 이럴 거면 왜 나를 숨 쉬게 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나는 거친 파도 가운데, 다시 혼자가 됐다. 자유롭던 깊은 바닷속과 달리, 외로움이 가득한 곳에서 나를 버리지 말라고 기도한다.
엄마가 부러워졌다. 오만하게 그녀를 위로하던 내가 참 우스워졌다.
그래도 나는 다시 평온하게 유영할 것임을 안다. 그리고 차갑고 아팠던 거친 파도 속에서, 홀로 숨 쉬는 법도 안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무너진다. 문득 사라봉에서 본 그 수평선, 안개가 걷힌 선명한 수평선이 보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