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직접 키운 작물은
더 건강할 거야 - 여름 준비

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7

by 소라

여름 준비


봄에, 큰외삼촌은 여름에 열릴 만한 작물들을 사 왔다. 큰외삼촌이 엄마에게 원하는 작물을 말하라고 했는데, 엄마는 거절했다. 지금 밭도 관리하기 어렵다고. 엄마는 큰외삼촌이 일을 벌이면 일은 자기가 해야 될 거라고 말했다. 밭에 나는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작물을 돌보는 일은 매일매일 해야 하는 노동이었다. 엄마가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심은 것은 할아버지의 창고에 있던 봉선화 씨였다.

큰외삼촌은 아주 가끔 거름을 줬다. 농약도 주지 않고, 거름도 거의 주지 않은 작물들은 다른 밭들의 작물보다 약해 보였다. 나는 옆집 밭의 파를 보고 우리 거랑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크고 푸릇푸릇해서 진한 녹색을 띠는 옆집 밭의 파와 달리, 우리 밭의 파는 노란 끼가 군데군데 끼여 있고 흐느적거렸다. 오죽하면 우리 작물들을 불쌍하게 본 옆집 아저씨가 엄마에게 거름 좀 주라고 했을까.

밭은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부여집의 밭처럼 하우스가 없는 밭은 말이다. 4월 말에 큰외삼촌은 여름에 수확할 수 있는 가지, 토마토, 근대, 아욱 등을 심었다. 엄마 말에 가지는 농사를 짓는 밭에 필수적으로 심는 작물이라고 했다. 농약 중독에 특효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학적으로 진짜 효과가 있는 것인지 민간요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지는 상비약처럼 키우던 식물이라고 했다. 구급차가 와서 병원에 가기 전에 긴급 처방으로 가지를 따서 먹였단다. 큰외삼촌은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당연하게도 가지를 심은 것이다.



키운다는 것


엄마는 매일 밭에 나가 작물이 얼마나 자랐는지 봤다. 농약을 안 줘서 잡초가 너무 잘 자란다며 밭을 맸다. 하지만 작물이 잘 자라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해하지는 않았다. 엄마 눈에는 그저 예쁘고 맛난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어쩔 줄 몰라하는 건 아빠밖에 없는 것 같다. 엄마는 언니와 나도 관심과 방목으로 키워냈다. 관심은 끊임없이 가지지만 절대 방향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취업 준비를 하며 엄마 집에 머물면서, 엄마에게 내가 걱정되지 않냐고 물어봤었다. 내 또래는 보통 취업 준비 중이었기에, 내 친구들의 어머니 모임을 가면 다들 자식 취업 걱정 얘기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 취업에 대해 별로 얘기도 하지 않고, 걱정도 없어 보였다. 다른 엄마들은 여기저기 취업정보를 물어보고 다니는데 내 엄마는 이상했다.

엄마는 ‘어떻게든 하겠지’라고 말했다. 내가 만족 못해서 그렇지 어디든 들어갈 거라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낮은 기대치에서 나오는 안도인지, 다 좋다고 생각하는 엄마 성격이 반영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막내인 나를 아직 애기로 생각하면서도 리본 묶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만능으로 생각한다. “우리 딸은 다 잘해!”랄까.

엄마는 어디를 가나 내가 야무지다고 말하고 다녔다. 나에 대한 엄마의 첫인상이 아직도 적용되는 것 같다.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야무지고 꽉 차게 생겼다며 ‘소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 이름은 의태어인 셈이다. 엄마는 자신의 작명 실력에 꽤나 만족했는지, 아기를 보러 온 주변 사람들에게도 소라를 닮지 않았냐며 자랑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어른들은 정말 닮았다고 말했다. 사람보고 깎아 놓은 밤톨 같다고 하는 묘사처럼 어른들의 묘사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엄마는 믿음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내 일에 크게 관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취업 스터디를 구했다고 말하면, 너무 잘했다고 어디서 공부하는 거냐며 카페 비용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취업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가끔 취업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엄마에게 서운해하며 배부른 소리를 했다.

취업준비생의 예민한 감정을 배려한다고 하기에는 학창 시절의 나에게도 비슷하게 대했었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아침에 깨우지 않았다. 핸드폰을 사주면서 내가 아침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날 수 있었던 원인도 크다. 언니는 중학교 때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서 무단지각을 며칠 동안 계속했다. 하지만 엄마는 깨우지 않았다. 나였으면 아침에 차에 태워서라도 등교시켰을 것 같지만, 엄마는 그게 별로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쩌면 그냥 피곤한가 보다고 단순히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엄마는 그 무렵부터 청소도 절대 해주지 않았다. 나는 청소하는 걸 정말 귀찮아했는데, 엄마는 가끔 내 방에 들어오려다가 멈칫 하고 ‘발 디딜 곳이 없네.’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내가 원할 때 청소하는 걸 기다려 준건지 사실 별 상관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언니가 대학교 1학년 때 학사경고를 받았을 때에도 엄마는 그걸 재미있는 에피소드 정도로만 생각했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어서, 어떻게 그런 성적이 나오게 되었는지 물어보며 웃기는 녀석이라고 말했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현재 언니는 성실한 직장인이다.


엄마가 자식에게 무관심할 정도로 관여하지 않지만, 사실 언니와 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 엄마는 치맛바람 좀 휘날린다는 학부모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운동회나 바자회 등 학교 행사가 있으면 뭐든 하나 이상은 도맡아 했다. 심지어 내 생일에는 생일을 축하한다며 반에 아이스크림을 돌리는 엄마였다. 정말 내 생일이 소중해서였는지, 내가 반장이나 부반장 등을 하지 않아서 생일이라는 핑계를 만들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자식에게 애정을 주는 부모였다. 그런데 나는 왜 엄마의 애정을 과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엄마는 어떻게 한 걸까.

엄마에게 관심과 관여는 전혀 다른 영역인 것 같다. 모든 것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내 성격상으로는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아빠는 관심은 별로 없으면서 관여하는 건 좋아한다. 언니는 관심도 관여도 모두 귀찮아하는 성격이다. 엄마처럼 관심은 많은데 관여는 하지 않는 사람을 또 본 적이 없다. 이런 사람이 농사일을 해야되나 보다. 나는 파가 왜 노랗지, 아욱에 왜 싹이 안 나지 걱정하면서 거름을 듬뿍 주게 될 것 같다.



내리사랑의 태도


나는 우리 집의 막내이자 외동인 아빠 덕에 친가에서도 가장 연소자였다. 외가에서도 여자 중에서는 가장 어린 막내라인이다. 학교를 다닐 때도 후배들과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선배노릇을 아예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대학원에 들어가니 몇 없는 선후배의 사이는 돈독하고, 선배에 따라 대학원 생활이 바뀌는 환경이 되었다.

나는 지도교수님 밑에 3년 만에 들어온 제자였다. 그래서 선배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나도 1년 만에 후배를 받으니, 받은 만큼 잘해주고 베풀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좀 과해서 후배한테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나가는 학회에도 데리고 가고 싶었고, 지도교수님의 성향과 대학원 생활에 대한 팁을 알려주고, 스터디도 같이 하며 졸업 논문 주제를 잡는 것도 도와주고 싶었다.

선배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하는 다른 과 대학원생은 나 같은 선배는 없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좋아하는 선배는 ‘힘들지, 잘할 거야.’라며 한마디, ‘한마디만’ 해주는 선배였다. 술자리에서는 절대 공부 얘기를 하지 않지만, 후배가 손을 내민다면 귀 기울여주고 도와주는. 나는 열정이 넘쳐서 귀찮은 선배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건 어찌 보면 후배가 혼자서 잘 못할 거라고 생각한 내 신뢰 부족이다. 나는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엄마 밑에서 자랐으면서, 여유로운 태도를 배우지 못했다.

졸업 논문을 쓰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인터넷에 올라간 논문은 해킹해서 삭제해버리고 싶었다. 그럴 때 졸업을 축하하며 졸업논문을 달라고 온 연락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 후 선배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며 후배한테 자연히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힘들 때 쓸데없는 도움은 오히려 자존심을 갉아먹기도 하기에. 하지만 아직도 먼저 연락 온 후배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 이 어렵다. 서른이나 먹은 나는 선배가 되기에는 너무 어린 인간이 아닌가 싶다. 언제 커서 누군가를 이끌고 키울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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