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와 청소는 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하는 일이다. 도배는 집을 고치는데 비용이 그나마 제일 적게 들면서 효과가 큰 수리였다. 그 전 세입자가 6년이나 살았고, 어린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벽지에 여기저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부딪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단열 때문인지 벽에 쿠션감 있는 벽지가 군데군데 붙어져 있었다.
도배 전
엄마의 사촌오빠, 나는 쉽게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그분이 도배를 하셔서 싸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몇 번 못 만나본 분이기 때문에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걸 들으니 딱 작은 외삼촌(엄마의 형제) 생각이 났다.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작은 오빠랑 외모와 성격이 정말 닮았다고 했다.
엄마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대학까지 충청도에서 나왔다가 첫 직장을 서울로 잡고, 시집도 서울로 왔다. 엄마는 서울에서 더 오래 살았지만, 충청도 사람 특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역별로 사람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오류가 있지만, 내가 느끼는 충청도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여유롭고 느리고 정확한 것보다는 유동적인 것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형제들은 모두 그런 편이다. 어느 누구 하나 강하게 말하지 않고 결정하는 것을 유보하기에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중에 생각해보자.", "그때 가서 말해보자.", "한번 보고 하자." 식의 말을 많이 한다. 나와는 정반대이다.
나는 굉장히 계획적이고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꽉 막혀있다. 미리미리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좋아하며 약속을 중요시 여긴다. 그런 성격 때문에 엄마와 갈등이 있을 때도 많았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방학에는 주로 집에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차려 놓거나 기다렸다가 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퇴근 한두 시간 전에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을 같이 먹을 것인지 확인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은 잘 맞지 않았다. 부모님은 외식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퇴근길에 즉흥적으로 먹고 들어올 때가 많았고, 대부분은 나에게 전화를 주지 않았다.
엄마는 늦으면 먼저 먹으면 되지 그게 화날 일인지 이해를 못 했다. 나는 왜 사전에 연락을 안 주고 계획이 바뀌는지 화가 났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미안해'라는 말에도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됐다. 엄마는 내가 저녁 약속을 말없이 어겨도 화가 나지 않고 이해할 사람이기에 화를 내는 내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엄마의 사촌오빠도 엄마와 엄마의 형제들 같았다. 내가 도배 날짜를 여쭤봤는데, 샘플을 가지고 한 번 오시겠다고 했다. 그럼 도배는 언제 시작하냐고 했더니, 날짜 봐서 하면 된다고 하시고, 금방 한다고 하시고, 집 좀 보고, 내일 들려보고, 하루에 안 되면 다음날 또 하면 돼~ 이런 대답을 계속하셨다. 정확한 약속을 잡는 걸 주저한다는 충청도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결국 내가 "이번 주 토요일에 이사청소를 하는데 하루 전 에는 도배를 끝내야 한다고 해서요. 그전에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봐서야, "수요일에 가서 보고 목요일~금요일 중으로 할게."라고 말해주셨다. 정말 평온한 말투로 말이다. 충청도 사람들이 정확히 약속을 잡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미루거나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마음이 여유롭고 말투가 그럴 뿐이다. 안달복달하는 건 나만의 일이었다.
이전 세입자가 벽에 붙여놓은 보온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 위에 도배를 하고 싶었다. 다행히 벽지 해주는 외당숙께서 그렇게도 많이 한다고 해서 기존의 벽지 위에 도배를 해주셨다. 도배를 하니 한결 깔끔해졌다. 내 기분도 덩달아 깔끔해졌다. 하나 끝내서 시원하다는 생각도 든 것 같다.
도배 후
도배를 하고 나니, 천장에 등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일부는 LED 등이었고, 일부는 형광등이었다. 등의 색에 따라 벽지가 조금 다른 색으로 보였다. LED의 수명이 더 길고 밝다는 걸 알고 있지만, 디자인이 별로였다. 통일하고 싶은데 돈도 많이 들고 공사를 해야 할까 봐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콘센트도 너무 낡아서 누렇게 물든 게 잘 보였다. 콘센트를 바꾸는 것은 생각을 해봐야겠다. 도배를 새로 하니, 집의 더러운 부분이 더 잘 보였다.
더러운 콘센트
도배를 하고 이틀 뒤에는 청소를 했다. 여기저기 검색해보다가 브랜드 업체의 프리미엄으로 신청을 했다. 프리미엄은 별점 상위 20%의 크린마스터를 보내주고 방역소독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오래된 집이니 깨끗하게 하고 싶어서 돈을 더 썼다.
토요일 9시에 청소를 예약했는데, 전날 연락이 와서 8시부터 청소를 해도 되냐고 물어봐서 8시부터 하기로 약속했다. 청소가 끝나는 예상시간은 3시 정도라고 했다. 아침에 오신 마스터는 남성분이셨는데, 인사를 하고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셨다. 나는 상위 20%의 크린마스터라고 해서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고 빠르고 똑 부러지는 분을 상상했다. 물론 프로 같기는 하시지만, 상상과는 좀 다르게 여유롭고 천천히 둘러보시는 분이었다.
어슬렁거리며 이방 저방을 둘러보시고 창문을 여셨다. 삼중창은 처음 본다면서 오래된 집인데 생각보다 잘 썼다고 했다. 창문을 세 개쯤 여셨을 때 도배를 해서 환기를 시키려고 열어놓는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설명을 해주시는데 무심한 듯하면서도 꼼꼼히 보셨다.
마스터가 추가로 하라고 조언한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싱크대의 실리콘을 새로 하는 것이었다. 마스터의 손을 따라가니 싱크대에 노랗게 변한 실리콘이 보였다. 원래 줄눈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곰팡이가 잘 생기지 않게 해 준다고 해서 염두는 하고 있었는데 청소하면서 하는 게 더 싸서 바로 하기로 했다.(4만 원 추가)
두 번째는 베란다의 곰팡이 제거였다. 베란다 벽에 드문드문 회색으로 변한 곳이 있었는데 심하지는 않아서 크게 못 느끼고 있었다. 마스터는 그게 곰팡이라고 말해줬다. 창문에 물이 서려있는 걸 보여주면서 이런 집은 곰팡이가 생기기 때문에 환기시켜서 창문을 말려줘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제야 창문에 있는 물기가 눈에 보였다. 원래 집에서 제일 중요한 게 습기를 잡는 거라고 생각해서 놀랬다. 곰팡이 제거도 추가해서 5만 원이 더 들었다.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면 마스터는 자세히 설명해주면서도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셨다. 곰팡이를 걱정하면 창문 잘 열어놓아라, 온도차가 밖이랑 많이 나는 겨울이랑 습기가 많은 장마철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다. 나무문에 붙인 고리들을 떼어줄 수 있냐는 물음에는 "뗄 수는 있는데 나무가 같이 떨어져서 자국이 생길 수도 있는데요. 한번 해보고, 안 되면 안 떼는 게 낫고." 이런 식으로 확답은 잘 안 해주셨다. 결국에는 다 깔끔하게 떼어주셨음에도 말이다.
마스터는 나가려는 나에게 자신들이 가져온 커피포트로 믹스커피도 타주며 마시고 가라고 했다. 누가 집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나보다 여유로우셨다. 이렇게 여유롭게 일하셔서 8시에 오신다고 한 거였는지 의문의 들 정도였다. 이 말투와 행동, 어디서 많이 봤다. 사투리는 안 쓰시지만 특유의 분위기, 설마?
점심쯤에 데러 온 부모님과 밥을 먹으면서 마스터가 충청도 사람 같은 성격이라는 말을 꺼냈다. 사투리는 느껴지지 않는데 묘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설명은 해주는데 확실하게 말하지는 않고, 무심한 듯하면서 친절하고, 말의 맺고 끊음이 불명확하다고. 엄마는 이미 내가 도배 삼촌이 진짜 충청도 스타일이라고 한 말에 격하게 공감한 바 있었다. 순하고 순박한데 나같이 계획에 집착하는 사람을 왠지 모르게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라고.
청소 중간중간에는 청소 과정을 사진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 내가 부모님과 밥을 먹고 있을 때 청소가 끝나버렸다. 지금 사는 집에서 가려면 1시간에서 30분은 걸려서 먼저 가시라고 돈은 보내드린다고 했더니, "아직 마무리 남았으니까 기다릴게요~"라고 하셨다. 나는 늦는 게 미안해서 돈 바로 드릴 테니까 가시라고 재차 말씀드려도 가신다고도 기다리신다고도 확실히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상황 봐서 만나면 보고 가고' 식의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한 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랑 같이 들어갔는데, 엄마가 마스터와 대화를 좀 나누다가 내가 점심 먹으면서 엄마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는지 마스터에게 말했다.
저희 딸이 사장님이 충청도 분 같으시다던데? 고향이 충청도 세요?
마스터는 화들짝 놀라면서 충청북도 옥천이라고 말했다. 충청도 중에서도 시골이고 충청도 색이 강한 곳이라고. 서울에 올라와서 산 지 오래됐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했다. "어머! 저희 딸이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게 충청도 스타일 같다고 해서요." 그리고 둘이 한참 충청도 얘기를 했다. 우리를 한 시간이나 기다린 클리너분은 당최 서둘러 갈 생각이 없었다. 내 도배와 청소는 모두 충청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서 결과는 만족하더라고 그 과정에서의 답답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청소하면서 문자로 보내주신 것들을 더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베란다와 연결된 주방의 창문 하나가 없고, 뽁뽁이가 대신 붙어있었다는 것과 베란다의 방충망 네 개 중에 세 개가 떨어져서 하나만 남았다는 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부엌의 창문은 외부와 연결된 것도 아니어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방충망은 큰 문제였다. 클리너가 곰팡이 때문에 환기를 자주 시키라고 했었는데 방충망이 하나밖에 없다면 큰일이었다. 남은 하나마저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다 삭아서 언제 부서지거나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클리너는 방충망을 찾다가 옆집과의 사이에 창고처럼 쓰는 곳에 떨어져 있는 방충망 하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하지만 쪽문이 잠겨 있어서 주워올 수는 없었다고.
부엌 창 / 오래된 샤시
집이 더러움을 벗으니 문제점들이 더 크게 보였다. 장판에 찍힌 자국들, 삭아 있는 나무 몰딩과 나무 문턱, 화장실 타일 사이에 깨진 백시멘트 등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가고 거실에 고요하게 앉아있으니 들리는 옆집 소리는 무서웠다. 이 집에 실망하고, 걱정이 되고, 그것은 내 불안함까지 자극했다.
나무 문턱과 화장실 타일
곰팡이를 걱정하다가 곰팡이 방지 페인트를 생각해내고, 집 앞 페인트 가게에서 붓까지 31,000원에 구입을 했다. '이걸 하면 되겠지' 했다. 페인트칠하는 법을 영상으로 공부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집 가는 길에 다시 부동산에 이사 날짜를 조정해서 내놓았다. 그런데 생각은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흘렀다.
연락이 잘되지 않고 집을 빼는데 적극적이지 않는 지금의 집주인 생각, 집이 안 나가면 돈을 못 빼준다고 했던 합정 집주인 생각, 내 은행 전세자금 대출금 생각, 이 집에 들어가는 돈 생각, 예산과 초과 금액 생각, 엄마의 이번 달 카드값 생각까지 했다. 엄마는 카드값이 900만 원인데 세입자 보증금을 돌려주는데 돈을 다 썼다고 말했었다. 내 집이 빠지지 않으니 엄마가 모든 현금을 끌어다 쓴 결과이다. 내가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난 못할 것 같아...
긴장과 불안은 계속 높아지기만 하다가 밤 10시가 넘어서 터지기 시작했다. 청소가 끝난 집에서 혼자 남아 느끼던 실망감과 불만, 그 기분과 분위기가 연상됐다. 떨어져 있던 방충망이 가장 잘 떠올라서 걱정하다가 방충망을 검색해봤다. 사람의 힘으로 잘 찢어지지 않고, 열리지 않게 고정할 수 있는 방충망이 있다는 걸 찾았다. 그런데 나처럼 오래된 집에 방충망을 교체한 사례를 찾지 못해서 더 불안해졌다. 엄마랑 전화하기에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업체에 전화하기에도 늦었다. 불안을 해소할 길은 없고 점점 생각은 아래로 아래로 길어만 진다.
할머니 집 샤시에 맞는 방충망이 없으면 어쩌지? 혹시 더 비싸거나 샤시를 바꿔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당장 다음 달 카드값도 걱정인데 샤시를 어떻게 하지? 방충망을 안 하면 벌레와 곰팡이는? 베란다로 도둑이 든 적이 있었는데 나도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지' 했다가, '안 될 것 같아, 못 할 것 같아.' 우울하고 암담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돈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 결국은 돈이 필요하다. 돈 때문에 나는 이토록 불안한 것이다. 계획이 있으면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데, 돈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월급쟁이이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음 달 월급이 갑자기 오르지는 않는다.
나는 내 통제를 벗어나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내 불안증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나는 아마 불안이 높은 아이였던 것 같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는지, 그렇게 자라게 된 건 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언니랑은 정말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언니를 키울 때는 알림장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학교에 들어가니 알림장을 적어왔다고 한다. 한글을 모르는 나인데도 어떻게 썼는지 알림장을 가져오고 가정통신문도 가져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엄마가 확인하고 숙제와 준비물을 챙겨줄 때까지 책가방을 들고 엄마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나도 기억이 난다. 그때 느끼고 있었던 극도의 불안함도 기억이 난다. 엄마가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내가 놀다가 잊어버리고, 엄마도 잊어버리면? 내가 준비물을 까먹고 안 가져가면? 내가 처할 민망한 상황이 걱정돼서 놀 수 조차 없었다. 엄마는 그런 내가 귀찮았다고 한다.
나는 불안함의 표현으로 엄마를 귀찮게 한 것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 불안 때문에 엄마에게 재차 확인하고 잔소리하고, 할 일을 자꾸만 던져준다. 세입자에게 줄 보증금을 다 마련했는지, 세입자가 공과금 정산을 하고 나가는지 등을 계속 확인하고 확인하도록 시킨다.
엄마를 못 미더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일까 봐 문제가 일어날 상황을 극도로 꺼린다. 내 불안 때문에 엄마를 괴롭히고 예민하게 구는 일에 대해 엄마에게 항상 미안하다. 나도 이런 내가 정말 맘에 안 들고 싫을 때가 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특히 그런 기분을 많이 느꼈다. 나만 여유롭지 못하고 쫓기는 사람이라는 기분을.
통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있고, 계획의 차질이 생기면 얼른 다른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극도의 불안과 우울을 느낀다. 나는 못할 것 같다는. 그리고 그만두는 것도 못할 것 같다는.
대학원을 다닐 때도 졸업논문을 앞두고 그랬다. 도저히 이 논문을 못 끝낼 것 같아서 불안했고, 대학원을 때려치우는 일도 못할 것 같아서 우울했다.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를 더 잘 알게 되면 내가 더 싫어질 때가 있다. 내가 밉다. 그만하고 싶은데 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못나 보인다. 나는 왜 불안이 높은 아이일까. 나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 나한테만 힘든 일 같다. 나만 어렵게 사는 것 같다.
울고 싶은데 방충망 때문에 우는 건 너무 우스워보여서 울지도 못하겠다. 나도 좀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다. 잘 좀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