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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 Jan 24. 2022

이사 준비와 MBTI

서른 하나에 만난 할머니의 오랜 집 5

 이사를 준비하는데 사야 할 게 많아도 너무 많다. 매일 인테리어 어플을 보면서 사고 싶은 걸 스크랩했더니 400개가 넘었다. 물론 다 사겠다는 것은 아니고 맘에 드는 냉장고 10개, 장롱 15개, 세탁기 5개 이런 식으로 스크랩을 했더니 400개가 되어 버렸다. 이대로는 정리가 안돼서 엑셀로 사야 할 것들과 예산, 구매 순위 등을 정해서 엑셀을 만들었다.

구매 목록을 정리해 놓은 엑셀 파일

 엄마가 해준다고 했던 에어컨과 도배, 화장실 수리를 뺐는데도 468만 원이라는 금액이 나왔다. 그중에서 살지 말지 고민 중인 것을 빼도 400만 원은 훌쩍 넘을 것 같다.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에 엑셀 파일을 캡처해서 공유했더니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언니, ISTJ 지?


 맞다. 나는 엄청난 ISTJ다. ISTJ 말고 다른 게 나와본 적이 없다. 작년부터 한참 유행하는 MBTI (성격유형검사)에서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로 나눈다. MBTI는 I(내향) / E(외향), S(직관-현실) / N(감각-미래), F(감정) / T(사고), J(판단-계획) / P(인식-유연)으로 성격을 구분한다. 그러므로 ISTJ는 내향적이고 직관적(현실적)이며 논리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교적이지 못하고 미래를 못 보고 감정이 메마른 꽉 막힌 사람이다. 이 유형의 별칭은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이다.


 MBTI별 팩트 폭력이나 다른 유형의 사람들끼리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유튜브도 많다. 예를 들어 "나 우울해서 쇼핑했어."라는 말을 친구에게 들었을 때의 상황을 주고 어떤 대답을 할지 물어본다. 그럼 F(감정) 유형의 사람들은 "왜 우울했어?"라고 물어보고, T(사고) 유형의 사람들은 "뭐 샀는데?"라고 물어본다. 나도 정확히 뭘 샀냐는 질문으로 답했다.

 T가 F보다 친구를 덜 걱정하는 것은 아니고 문제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친구의 우울한 감정을 상기시켜주고 싶지도 않고, 쇼핑을 했을 때의 기분에 맞춰주고 싶다. 그리고 진짜 그 친구가 무엇을 샀는지가 제일 궁금하고.

 내 MBTI를 맞춘 친구는 INFP로 MBTI에 가장 심취하는 유형이라고 한다. MBTI는 역시 과학이다. 내 유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는 팩트 폭력을 읽고 내 회사 동료들은 심각하게 공감했다. 나는 눈치 없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 MBTI에 따르면 나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 유형인 ISTJ가 어떤 일을 앞뒀을 때 두드러지는 특징은 플랜 A부터 Z까지 다 짜 놓는다는 것이다. 나는 격한 공감을 했다. 내가 스크랩한 상품이 400개가 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른 게 품절되거나 사이즈가 안 맞았을 때를 대비한 선택지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나도 나를 좀 놓고 싶은데 피곤하게 사는 내가 싫어질 때가 있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계획에 어긋나는 일이 자꾸 생긴다. 그리고 그 일들은 대부분 내 통제 밖이다. 갑자기 배송을 온다고 한다거나 물건이 잘못 배송되거나, 살고 있는 집이 나가지 않는 등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다 챙기려다 보니 스트레스받고, 내 일도 아닌 엄마 일까지 잔소리하게 된다. 이런 내가 별로인 사람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에도 성격유형검사를 했었고, 작년에도 MBTI가 유행할 때 내 유형이 검사를 했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관심을 갖지는 않았었다. 최근에는 다른 사람의 MBTI도 맞춰보고 싶을 정도로 빠져있다. 나와의 차이를 찾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를 알아가는데 심취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서른한 살이 된 이후 나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히 올라갔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남에게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내면에 대해서도 딱히 큰 관심은 없었다. 망상을 잘 하지 않는다는 S의 특징인 걸까? 현실적 문제 이외에는 별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N과 S의 차이 : 내가 말하는 게 딱 S 같다.

 학창 시절에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효율적 일지에 초점을 맞춰서 성격을 파악했었다. 가야 할 학과를 고르는 참고자료로도 생각했다. 대학생 때는 진로에 포커스를 두고 내 성격을 고민했다. 내 성격상 어떤 일이 잘 어울리고 잘할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나한테 관심이 있다. 나는 내가 무척 궁금해졌다.

 서른 하나가 되고 나서야 나를 알고 싶어 졌다니, 내가 나에게 너무 무심한 건지 다들 이렇게 사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환경 탓도 큰 것 같다. 그동안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고 항상 큰 목표가 있었기에 그곳에만 몰두했다. 내 성격 상 나는 하나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니까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길을 걸을 때도 목적지까지 효율적으로 가기 위해서만 발을 내딛는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식당과 노점상들을 둘러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지나온 길을 또 가도 기억을 잘 못한다. 둘러본 적이 없기에. 드라이브나 산책은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지금은 공부도 취업도 모두 끝나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까 고민하고 있다. 슬프게도 내 인생은 이제 대충 어떻게 살게 될지 답이 나와있는 것 같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이렇게 회사를 다니다가 몇 년 차쯤에는 승진을 하고, 돈은 얼마쯤 모을 수 있을 것 같고, 몇 살에 정년퇴직을 하고 이런 계획들이 머릿속에 자연히 펼쳐진다. 아마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생 이리라. 그게 참 다행인가 싶다가도 지루하다.


조금만 덜 지루하게, 괜찮게 살 수는 없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뭘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게 '나'였다. 나에 대해 뭘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아닌가. 현실적인 문제에서 조금은 철학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집을 구하고 정리할 때도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습관이 있는 지를 알아야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나를 알아갈수록 실망하기도 하고 나름 뿌듯하기도 하지만 앞으로 70년을 더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숙제 같다. 나를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이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누가 보나 ISTJ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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