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집은 옵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필수 가전들도 모두 구매해야 한다. 필수 가전 3 대장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은 가장 돈이 많이 들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가전이다. 언니랑 합정 투룸에 살았을 때도 옵션이 없어서 이 가전들을 모두 샀다. 각각 40만 원, 30만 원, 30만 원 정도에 구입했던 것 같다.
언니랑 오래 살 생각도 없었고, 내가 취업하면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있으니 이사 갈 때 버릴 생각으로 싼 제품으로 샀었다. 이사하면서 냉장고, 세탁기는 합쳐서 12만 원 받고 중고업체에 넘기고, 에어컨은 다음 세입자에게 10만 원에 넘겼다.
100만 원 - 12만 원 -10만 원 = 78만 원
78만 원 / 24개월 = 3.25만 원
한 달에 3.25만 원의 사용료를 낸 셈이니 나름 합리적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 집에서 사용하게 될 가전은 합정집에서 썼던 것과 비슷하게 살 수가 없다. 냉장고, 세탁기는 작은 용량으로 싸게 산다고 치더라도 에어컨은 그럴 수가 없다. 평형에 맞춰 나오는 에어컨은 원룸용 벽걸이와 일반 가정용 스탠드 에어컨의 가격 차이가 몇 배나 난다. 작은 평형을 샀을 경우 집 전체가 시원해지지 않아 있으나 마나 할 가능성이 크다. 전기료도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그 때문에 아무리 싼 걸 찾아도 20평이 넘는 집에 맞는 에어컨은 100만 원이 우습게 넘는다. 전기료 절감을 위해 방에는 벽걸이 에어컨, 거실에는 스탠드 에어컨으로 2개를 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세트로 상품이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방 안에서 주로 생활하는 나도 그 편이 더 경제적일 것 같은데, 혼자 사는 집에 두 개의 에어컨이라니... 너무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거실에 에어컨을 안 놓으면 여름 내내 방안에만 갇혀있을 것 같고, 거실에만 에어컨을 두자니 하나의 에어컨이 커버하는 면적이 너무 커서 전기세가 많이 나올 것 같다. 그래서 세트 상품이 있는 거겠지.
고민되는 것은 에어컨만의 문제가 아니다. 쓰다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가전을 가장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것으로 구매하는 게 맞다. 문제는 정말 내가 쓰다가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될는지, 할머니 집에서 눌러앉아 살게 될지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좋은 거 사서 오래 쓰는 게 어때?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가 사려고 찜해둔 가전들을 보고, 오래 쓸만한 가전을 사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신혼집에 들어갈 가전을 고르는 거니, 기왕이면 좋은 거, 오래 쓸 수 있는 거 기준으로 가전을 고를 것이다. 나도 결혼할 때는 그러고 싶으니까.
나는 결혼할 때를 대비해 좋은 가전을 사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결혼할 때는 1인용이 아닌 2인용 혹은 아이가 생겼을 때도 쓰기 좋은 가전으로 구매하고 싶다. 그리고 혼수는 새것으로 하고 싶다는 게 내 욕심이기도 하다. 좋은 가전을 사서 쓰다가 결혼할 때 새로 사는 것은 너무 돈이 많이 든다. 가전은 중고로 팔 때는 똥값이 되어버린다.
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진짜 좋은 걸 사서 오래 쓰는 게 낫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할지도 모르는, 어쩌면 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결혼을 전제로 가전을 고르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생긴 것이다. 이제 취업도 했고, 내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잘리지는 않을 것 같은 직장이라서 결혼을 하거나 청약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이 집에서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조금 더 멀리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결혼주의자였다.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꼭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직업적인 성공보다 위에 놓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모든 걸 같이 하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어릴 적부터 짝꿍 같은 남편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른 전에는 남편이 없는 인생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연애도 결혼과 분리해서 한 적이 없었다. 연애가 발전하면 결혼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벌써 서른 하나가 되고 남자 친구 없이 산 지 2년이 넘어가니까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실 결혼 자체가 아니라 누굴 만나냐가 더 중요한 거니까. 나와 맞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연애만 하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굳이 남자 친구가 없다면 결혼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연애를 하려고 소개팅을 자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니 나한테 맞는 사람은 진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또 굳이 맞추면서 살고 싶은 생각도 적어지게 된다. 몇 번의 데이트를 하고 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러다 집에서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혼술이라도 하게 된다면, "아, 나 지금 행복하구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행복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던 혼술의 시간
이별을 비슷하게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노력하는 과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차피 헤어질 건데... 이 감정 소모가 그저 힘듦으로만 다가온다. 사람 만나는 일에 지치다가 혼자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그게 또 그렇게 좋고 편할 수가 없다.
그만큼 내가 지금의 내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큰 이슈는 없어도 혼자 살면서 가지는 안락함과 작은 행복들이 맘에 든다. 한편으로는 혼자서 나 하나정도야 어영부영 대충 소소하게 행복할 수 있는데,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다른 사람을 책임지기에는 자신이 없기도 하다. 아직 그 정도까지 어른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플랜을 A부터 Z까지 생각하는 내 MBTI의 특성상 나는 머리를 자를 때도 다음, 다다음 헤어스타일까지 생각한다. 최근에 머리를 단발로 자를지 말지 엄청나게 고민했었는데, 그 이유는 결혼할 때 긴 머리로 하고 싶어서이다. 고민해보니 지금 남자 친구를 당장 사귀어도 1년 정도는 연애를 할 테니 그 안에 기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이르러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 단발에서 머리를 기르는 과정까지 모두 계획해놨다.
아무리 혼자 사는 게 좋아도 나는 아직 결혼을 포기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결국 가전은 비싸고 성능이 좋은 것보다는 가성비 좋은 것을 선택했다. 할머니 집에 사는 것은 결국 임시거주일 뿐이다. 임시거주여도 대충 살 수는 없기에 고르고 또 골랐다.
에어컨은 아직 겨울이라 급하지 않아서 천천히 내년에 사기로 했다. 에어컨 상담을 다녀본 친구에게 물어보니, 20평대는 거실에만 벽걸이를 설치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정 필요하면 방에 하나를 더 달면 된다고. 그래서 내년에 생각해보고 천천히 설치하기로 했다.
냉장고는 혼자살기에 너무 크지 않은 333L로, 세탁기도 이불 하나정도는 빨 수 있는 13KG으로 구입했다. 그래도 나름 욕심내서 둘 다 S전자 제품으로 구매했다. 냉장고는 진짜 고민 많이 했는데 문짝의 색상을 고를 수 있는 제품으로 샀다. 정가는 이 제품이 훨씬 비싸지만 세일을 많이 해서 일반 냉장고보다 3만 원 정도 비싼 수준이었다. 핫딜가라 냉장고와 세탁기를 합해서 9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