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언제나 집이 문제다. 십여 년 전에도 손에 닿을 것 같지 않았던 집값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내 집 마련이란 게 소위 각 잡고 달려야만 겨우 이룰까 말까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죽했으면 얼마 전에 있었던 시상식에서 한 배우가 수상소감으로 4살이나 어린 국민 MC에게 푸념 아닌 푸념을 했을까.
“재석이 형. 아파트 값 좀 잡아줘요.”
집은 ‘사람이나 동물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 이란 사전적 정의의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다. 게다가 그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졌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도 힘들어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이라는 단어 안에 수많은 의미들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집이란 단순한 주거시설 정도가 아니다. 집은 곧 성공이고 결혼이며 꿈이자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척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내 집 마련이라는 레이스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 청춘과 꿈과 돈이라는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
만약에 이 치열한 레이스에 뛰어들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고 그러고 싶지만,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에 선 듯 용기가 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이 개샹마이웨이가 아니고서야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하지만 여기, 그 말도 안 되는 용기를 낸 여자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그녀 입장에서는 큰 용기라고 할 수도 없다. 그녀는 의식주보다는 술과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는 아주 유니크한 여자이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유니크함에 집을 포기해 안쓰럽다 못해 위태롭기까지 한 미소의 이야기다.
미소의 시간은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또래 친구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돼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가사도우미라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전전한다. 누가 봐도 되게 불안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막상 그 당사자인 미소는 천하태평이다.
그녀가 이처럼 속편 하 게 사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이렇다 할 욕심도 계획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며 마시는 위스키 한잔과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인 한솔이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식처이니까.
하지만 이 세상이란 놈은 대체 무슨 심보인지 이런 소소한 행복을 늘 가만두지 않는다. 일당은 그대로인데 모든 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월세가 5만 원이나 오른 것도 억울한데 그 소중한 담배와 위스키 값마저 올랐다. 마치 지금이라는 시간에 안주하고 있는 미소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대체 왜 세상은 나를 가만두질 않는 걸까. 대체 왜 지금이란 곳에 안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뒤처지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걸까. 미소는 그렇게 자칫하면 자신을 마모시킬 수 있는 부정적인 질문은 뒤로 한 채 일단 어떻게 하면 지금의 소소한 행복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명확한 고정지출 덕에 적자가 확정된 상황. 그렇게 가계부를 보며 고민을 하던 미소의 머릿속에 번뜩하며 기적의 계산법이 떠오른다.
바로 고정지출 항목에서 월세를 제외하는 것.
굉장히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미소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녀를 지탱해주는 안식처 중 애초에 집이라는 항목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거기다가 일단은 믿을 구석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10여 년 전 함께 동고동락했던 밴드부 멤버들이 있었으니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축약된 온갖 인간 군상들이.
이 영화의 서사는 철저히 지금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 흔한 회상 씬 조차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등장인물들의 과거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단지 몇 가지 대사로 미소가 고아이고 대학을 중퇴했으며 예전에는 회사생활을 했다는 것만 알려줄 뿐 왜 지금의 미소가 되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마치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미소처럼.
하지만 미소가 가장 먼저 찾아간 동성 친구인 문영과 현정은, 이 지금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 큰 회사가 목표인 문영은 지금의 커리어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전업주부인 현정은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각자의 불만족은 그녀들의 현재를 여유 없게 만들었다. 물질적인 것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심적인 여유를.
그녀들에게 여유가 없는 이유는 자기의 본연 성을 억제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 ‘여자라는 이유로’라는 전제 조건이 붙는 사회적 분위기 말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인식이 변했다곤 하지만 아직도 그런 분위기는 도처에 깔려 있다. 회사에는 담배 피운다는 사실을 숨기고 몰래 집에서 피울 수밖에 없는 문영이나 시댁살이로 음악 활동을 하지 못하고 몰래 코드 빠진 전자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현정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각자의 결핍이 확연히 드러난 그녀들보다 오히려 미소가 더 여유로워 보일 지경이다. 대체 무엇이 직장도 가족도 없는 미소를 이토록 여유롭게 만드는 것일까. 그 답은 예민해서 누구랑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자 그냥 보고 싶어 왔다는 미소를 보며 어딘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문영의 대사 안에 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너... 여전하네.”
인간 생활의 삼대 요소인 의식주 중, 주(住)가 주(主)가 된 건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이 씁쓸한 주종관계에 얽히면 집이란 더 이상 거주시설이 아닌 수용시설이 된다. 그리고 이 집이라는 감옥의 무게에 짓눌리는 건 아무래도 남자 쪽이 더할 것이다.(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연 성을 억누를 때는 ‘여자라는 이유로’라는 전제 조건이 붙지만, 이 집이라는 것에는 보통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전제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가장이라는 견장을 자연스럽게 남자들이 짊어지게 만드는 암묵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있으니까.
“누나. 여긴 못 벗어나. 집이 아니라. 감옥이야. 감옥.”
대용 역시 그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원금 포함 한 달에 100만 원이라는 대출금을 내며(무려 20년을 갚아야 한다) 겨우 아파트를 장만했건만, 그토록 아파트라며 노래를 부르던 그의 피앙새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졸지에 김첨지 신세가 된 대용이 할 수 있는 건 우울증에 빠진 채 술을 벗 삼아 겨우 잠을 청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이제는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 대출금을 갚아 가며.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건 록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라면 대용의 감옥은 자본주의가 만든 감옥이고, 록이의 감옥은 이념이 만든 감옥이라는 것이다. 대를 이어 가장이란 견장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유교적인 이념 말이다. 그리고 록이는 이런 유교적인 강박이 만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물리적인 폭력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수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말을 하지 못하는 부친과 연세가 많은 모친을 모시고 사는 효자였으니까.(영화 중간중간에 부모님을 위해 기타를 치는 록이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 그의 효심은 탓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그 효심을 이루려는 방법이 꽤나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단지 부모님이 좋아한다는 이유로(단지 미소가 결혼 적령기의 여자였기에 좋아했을 것이다) 미소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하는 추태를 보였으니까.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치근덕거림에 미소가 말한다.
“왜 하필 난데?”
“너 갈데없다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의 당위성을 구하려는 록이의 저 말은 폭력적이다. 그리고 어딘지 슬프다.
결혼에 대한 압박에 내몰린 록이의 현실과, 집이 없다는 이유로 생각과 취향을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미소의 현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대사 이기도 하니까.
다음날 록이의 집은 비유가 아닌 진짜 감옥처럼 변한다. 미소를 못 나가 게 하기 위해 온 식구가 작당하여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을 모조리 막아 버리니까. 영화의 재미를 위해 설정한 이 희극적인 모습은 어딘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섬찟하기도 하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소수의 가정에 계승되고 있는) 그 광적인 유교적 강박(대를 이어야 한다는)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차마 떠나지는 못하고 누군가 그 옆에 함께 갇혀 있길 바라는 슬픈 자들의 감옥을.
이제 남아있는 밴드부원은 정미뿐이다. 정미는 부자인 남자와 결혼해 어엿한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가 넘쳐 보이는 그녀가 미소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학창 시절에 다단계에 빠져 빚을진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게 다름 아닌 미소였으니까.
정미 집에 정착한 미소는 다행히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커다란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할 수 있고 근사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잘 수도 있다. 거기다 이전보다 돈도 더 잘 모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지만 미소는 뭔가 불안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기분이 안 좋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 같은 거니까. 그리고 늘 그렇듯 이런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대학 시절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냐는 정미 남편의 말에 미소는 그녀는 뜨거운 사람이었으며 기타를 잘 쳤다고 말한다. 자상한 엄마이자 정숙한 아내인 정미의 뜨거웠던 청춘의 시절을 떠올리며.
하지만 정미에게는 그런 뜨거운 시절을 마음껏 향수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 역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본연 성을 억제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문영이나 현정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정미가 그런 본연 성을 억제 정도가 아닌 금기시 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남편을 둔 정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정미는 자기의 금기를 건드린 미소의 말에 공격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청춘과 꿈을 포기한 채 달려올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간을. 그리고 태생적인 뜨거움을 겨우 삭이며 지켜왔던 정숙한 아내와 자상한 엄마의 역할을. 그렇게 본의 아니게 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한 정미는 그보다 더 큰 폭력으로 똑같이 되갚아 준다.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 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 구해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지내면서. 그런 것까지 다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네가 뭔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 안 드니?”
정미의 이런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집 하나도 없는 주제에 비싼 위스키와 담배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도 모자라 남편 담배 피우는데 까지 따라가는 바람에 자기 체면이 엉망이 됐으니까.
하지만 이런 비난을 무작정 받기에는 미소도 억울함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앞서 이미 말했지만 미소가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건 방탕해서 가 아닌 정말 그것들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미소에게 잘못을 찾자면 자신의 본연 성을 잃지 않은 채 모든 감정과 시간을 지금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저당 잡히기엔 그녀의 지금에는 너무 소중한 게 많았으니까.
위스키, 담배, 그리고 한별.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여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이 틀린 게 아닌 그저 각자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쪽을 선택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손을 들어주는 건 정미지 미소가 아니다. 대게 미소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받기 마련이다.
그 마음을 잘 알아서 일까?
미소는 아빠 모를 아이를 임신한 민지가(미소의 가사도우미 고용주이며 업소 직원이다) 헤퍼서 이런 벌을 받는 거라는 말하자 이렇게 답한다.
“헤픈 게 어때서요.”
그 말은 민지를 위한 가벼운 위로만은 아니다. 미소 본인은 물론 그녀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며 손가락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 하나로 틀렸다는 비난을 받는 건 아무래도 억울한 일이니까.
어쩌면 민지가 처음부터 미소를 마음에 들어했던 건 그녀의 이런 점 때문일 수도 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은 서로 미묘하게 닮았으니까.
민지는 첫 만남부터 젊은 나이에 가사도우미가 직업인 미소를 무시하지 않았고 (영화 처음에 한 번 나오는 미소의 친구는 은근 그녀를 무시하는 기색을 보였다) 미소 또한 민지가 업소 직원이라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녀들은 각자 중요하다고 생각 뭔가를 선택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걸 선택한 그 이면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었을 테니까.
미소는 종국에 와서야 겨우 자기와 닮은 사람을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들은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업소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민지는 더 이상 업소에서 마련해준 그 집에서 살 수 없었으니까. 미소와는 달리 민지는 지금에만 집중하는 대가로 그 집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금만을 살아가던 두 여자는 최후의 만찬을 하기로 한다. 메뉴는 닭백숙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닭백숙에 조금은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새와 관련된 장치들이 많이 나온다. 미소는 편지에 꼭 새 그림을 그려 넣고 밴드부원들의 집을(회사로 찾아간 문영은 제외) 찾아갈 때면 항상 계란 한 판을 들고 간다.
왜 하필 새 그림이고 왜 하필 계란일까?
어쩌면 미소는 모든 사람을 한 마리의 새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란은 아직은 성숙하지 못했던 시절의 상징 같은 것이다. 밴드부원들과 함께했던 대학시절처럼.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시절을 미소와 정답게 나눈 사람은 현정뿐이었다. 여건은 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미소를 반갑게 맞이한 건 현정이었고, 정답게 예전 이야기를 나눈 것도 현정이었다. 그래서일까? 극 중 미소가 자신이 사간 계란을 먹은 것도 현정의 집이 유일하다.
이미 훌쩍 커버린 상태에서 만난 미소와 민지에게는 서로 나눌 추억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대신 그녀들은 다른 걸 나눌 수가 있다.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쓰지 않고 타인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동질감과 각자의 선택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그렇게 두 여자는 계란이 아닌 닭백숙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선택을 응원한다. 각자의 영역에서 힘차게 날갯짓을 하길 바라면서.
미소의 추운 겨울이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녀는 현재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로 더 큰 상실을 하고 더욱 떠돌게 됐으니까.
이 이후로도 진행된 미소의 이야기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면 결말까지 쓰게 될 것이니까.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그것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하지만 이 말 만은 남기고 싶다. 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부터 내내 미소의 미소가 그리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