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헤드의 Creep가 흘러나온다. 좋은 징조다. 만약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라디오 헤드라고 말할 것이다. 영국 특유의 안개 같은 칙칙함이 녹아있는 브릿팝이야 말로 진정한 음악이며, 그 브릿팝의 대표주자인 라디오 헤드야말로 진정한 가수라고.
하지만 음악에 조예 깊은 누군가가 브릿팝은 그런 장르가 아니고, 라디오 헤드도 브릿팝 밴드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나는 정말이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할 것이다. 브릿팝에 관한 건 물론이고 라디오 헤드의 멤버가 몇 명인 지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라디오 헤드니 브릿팝이니 지껄이는 내 말은 일종의 허세인 셈이다. 몸을 보호하려고 털을 곤두세워 몸집을 부풀리는 동물 같은 허세 말이다.
이렇게 빈약함으로 무장된 허세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껏 단 한 번도 까발려진 적은 없다. 인터넷 각종 커뮤니티에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그렇게 넘쳐나는데 이상하게 현실에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디오 헤드니 브릿팝이니 멋대로 지껄여도 돌아오는 건 팩트로 무장된 반박이 아닌 자기들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긍뿐이다. 실소가 나오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천만다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라디오 헤드에 관한 내 허세가 모두 거짓인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의 노래 Creep를 좋아한다는 것 하나는 사실이니까. 그 우울하고 칙칙한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낮게 깔린 안개로 자욱한 (가보지도 못한) 런던 한복판의 어딘가가 떠오른다. 그리고 어딘지 부쩍 차분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뭔가에 집중하고 싶을 때면 늘 Creep를 듣는다. 그리고 지금처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떤 계시를 받는 기분마저 든다.
But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 here?
I don't belong here
클라이맥스 부분이 끝나자 나는 잔에 있는 기네스를 몽땅 비우고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창가 자리로 갔다. 물론 이 바의 창가 자리가 명당인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여자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불청객의 등장에도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이쪽을 한번 쳐다보고 글렌캐런 잔에 담겨있는 위스키를 홀짝거리고는 다시 책을 읽을 뿐이었다.
그녀는 정확히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중간쯤에 있을 법한 표정을 지으며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몇 년 전 새로 출판된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어쨌거나 책의 제목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이 매력적인 여자가 둘 중 하나일 거라는 사실이다. 진성 하루키 팬이거나(위스키를 마시며 하루키의 책을 본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하루키 팬다운 모습이다.) 나처럼 허세로 무장된 사람이거나.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어느덧 불청객이 된 지도 오분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이 가게가 생기기 전부터 그 자리에서 싱글몰트와 함께 독서를 했던 사람처럼.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말 저녁 건대 앞에 모인 수많은 군상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소비하러 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유독 눈이 띄는 두 무리가 있었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핫하기로 소문난 헌팅 포차 앞에 있는 대학생들이었다.
여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단단한 팀워크를 과시하듯 서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오 미터쯤 떨어진 곳에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이 늑대 무리처럼 모여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일면식은 물론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두 무리를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내기 한번 할래요? 저는 저 학생들이 오 분 안에 합쳐져 다른 곳으로 간다에 걸게요.”
불청객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그녀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들을 보던 그녀는 뭔가 확신이라도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만약 그쪽이 지면 어떡할 건데요?”
“지면 이대로 사라져 드려야죠.”
“이기면?”
“이기면 저한테 한 시간만 투자해 주시죠.”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 했는지 새침한 표정과 함께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콜.
우리는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하염없이 그곳을 쳐다봤다. 결과는 뻔했다. 늑대 무리 중 리더로 보이던 남자 한 명이 슬그머니 여자들에게 다가갔고 몇 마디 던졌고 다 같이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짝이 맞았던 두 무리는 하나가 되었고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졸지에 내기에서 진 그녀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었다.
여자들은 다가올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서로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고, 남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장난을 치면서도 조금씩 여자들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으니까. 서로가 우리는 너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허세를 부려가며. 그리고 그런 허세란 대게 뭔가를 원하는 게 있는 사람들이 부리는 것이다.
왜 그렇게 잘 알고 있냐고? 당연한 일 아닌가? 내가 딱 저 나이 때 저랬으니까.
그때만 해도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친구들이 넘쳐났다. 어딘지 닮아있던 우리는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저녁만 되면 길고양이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하나같이 쾌활해 보였지만 저마다의 불안감을 숨긴 채 웃고 떠들어 대며. 우리는 그렇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던 청춘이라는 시간을 그곳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누군가는 이런 우리에게 재미있는 청춘을 보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헛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어느 쪽의 말이 맞느냐. 솔직히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렇게 흘려보낸 내 청춘이 시험 기간에 걸쳐있던 축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한바탕 즐기다 보니 어느덧 축제가 끝났고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답안지를 체크해야만 한다. 오로지 운과 직감과 운명에 모든 걸 맡긴 채.
그녀가 위스키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후회해요?”
내기에 져서 일단 한 시간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책 표지를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후회야 늘 하죠. 그런데 어느 쪽을 선택했든 후회는 했을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을 선택했던?”
“당연한 거 아닌가? 하다못해 로또에 당첨된 사람도 후회는 할 걸요? 그때 그 번호로 몇 장 더 사둘 걸 하고.”
시종일관 철옹성 같던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은 삼십 분 남짓. 그다지 나쁜 페이스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황의 시간을 보내면 의외로 얻는 것도 많거든요.”
“무엇을 그렇게 얻으셨을까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지 빈정거렸다. 얼핏 들으면 불청객에 대한 혐오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와서 혐오감을 보이기에는 그녀는 이미 나에게 상당한 시간을 허용했고, 애초에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면 처음부터 꺼지라고 말했을 테니까.
잠잠하다가 지금에 와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하나다. 그녀 또한 나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잠깐이었지만 웃음을 터트릴뻔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한 허세.
“일단 사람 보는 눈을 얻었죠.”
“예를 들면?”
“예를 들면...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는 못돼먹은 아이 같다는 거?”
그녀의 미간이 구겨지기 시작하자 나는 급히 말을 이어갔다.
“누구나 애 같은 구석이 있잖아요. 깊숙한 어딘가에 방을 하나 만들어 놓고 누구도 찾아오길 바라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찾아와 주길 바라는 그런 마음. 그런데 하루키 팬들은 그 방을 훨씬 더 복잡하게 설계하죠. 아주 복잡한 미로 한복판에 방을 만들어 뒀으면서 그 미로를 뚫고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쉽게 말하자면 온전한 내 편을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갑자기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한잔 더 주문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하루키 팬들의 심리는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고 봐요. 조금 더 과장하면 하루키가 그 마지막 문장을 쓰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죠. 자기 글을 좋아해 줄 사람들의 심리를 하루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그녀는 이미 상실의 시대를 여러 번 읽은 모양이었다. 묘한 표정과 함께 그 문장을 떠올리는 모습이었으니까. 하루키의 팬이라면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그 문장을.
‘나는 아무 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주문한 위스키가 나오자 그녀는 책을 덮고 그걸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스피커에서 또다시 Creep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다. 그리고 좋은 징조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불러온다. 위스키를 마시던 그녀가 갑자기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으니까.
그녀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사기꾼?”
“설마요. 그냥 하루키와 하루키의 모든 작품들을 사랑하는 열렬한 팬이죠.”
그때 누군가 스피커에 손이라도 댄 모양인지 갑자기 음악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필이면 1절 클라이맥스로 접어들던 부분이라 마치 공연장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But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 here?
I don't belong here
갑작스러운 고음에 목소리가 묻힐까 두려웠는지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도 하루키 좋아해요?”
하루키를 좋아하냐고?
그 말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다. 나에게 있어 하루키나 라디오 헤드란 그저 유명한 사람들. 그리고 상실의 시대와 Creep는 그저 그들의 대표작이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알아챘겠지만, 그녀에게 지껄였던 하루키 팬들의 심리가 어쩌고 하는 것 또한 내 허세에 불과하다.
만약 그녀의 손에 있던 게 코엘류 책이었다면 난 코엘류 팬의 심리를 들먹였을 것이고 김영하 책이었다면 김영하 팬의 심리를 들먹였을 것이다. 그 시작이 무엇이든 결론은 하나다.
당신은 복잡한 미로 한복판에 있는 그 방까지 찾아와 줄 온전한 당신의 편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리고 대게 이 방법은 기가 막히게 잘 먹힌다.
왜 그렇게 단언하냐고? 당연한 일 아닌가? 나 또한 그녀처럼 온전한 내 편을 바라는 사람이니까.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온전한 내 편을 바라고 사는 존재이니까.
결국, 우리는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수많은 말이 오고 갔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는 없었고, 그 의미 없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쩌면 암묵적으로 서로에게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기로 합의한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