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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色, 진주의 色

공주 사는 여행객이 남원과 진주를 느끼다

by 북장

남원과 진주로 여행을 떠났다.

두 곳 모두 내 평생 처음 방문한 지역이다.

동생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갑자기 떠난지라 검색을 한다든지 뭘 찾아보지도 못했다.

그저 숙소를 예약하고 광한루와 진주성 딱 두 개만 콕 집어놓고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 출발한 여행이었다.




내비에 남원예촌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신나게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원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오랜만에 만난 옛 정취'였다.

뭔가 아주 예전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남편과 여행을 하던 때가 떠올라 그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기자기한 건물들 사이를 거닐 때마다 왜소 나무의 달큰한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골목골목마다 나른하게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웃음을 자아내는 호랑이 훈장님과 맹꽁이 등을 만나며 마냥 웃음이 나왔다.


광한루는 시시각각 풍경이 달라져 걷고 걸어도 또 걷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신기한 곳이었다.

고즈넉한 풍경에 누각과 조경을 어쩜 저리도 아름답게 배치했는지.

저 원앙과 잉어들은 언제부터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을지.


한낮의 광한루는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색색깔의 잉어들이 유영하며 만들어내는 물결이 한 폭의 그림이오.

원앙 떼의 날갯짓과 울음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풍경은 한 편의 음악극이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과 물 위에 반사되는 풍경이 그저 눈에 각인될 뿐이었다.

한 밤의 광한루는

수많은 조명이 나무와 전각들을 색색들이 곱게 물들이며 현혹하고, 현대적인 색과 감각을 입혀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했다.

어디서 촬영을 왔는지 방송용 카메라를 든 분들도 보여 그분들 뒤에 조심히 서서 같은 구도를 담아보려 한다.


남원예촌은 켄싱턴 계열에서 운영하는 한옥 호텔 같았다.

광한루 주변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서 방에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평온해진다.

대청마루에 알록달록한 전통 다과상 하나 시켜놓고 요리조리 사진을 찍어본다.

사진 찍을 만큼 찍었으면 편하게 등 기대고 책이나 읽자.

그 사이 딸아이는 잠옷으로 환복하고 뜨끈하게 지져진 바닥에 배 깔고 게임 삼매경이다.

그 옆에서 같이 게임노동의 톱니바퀴에 빠져드는 이모라니.

이것 또한 남원의 여유로운 바람에 취한 덕이리라.








다음날 남원을 떠나 도착한 진주성은 평소 보던 공산성의 풍경과 너무 달라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넓은 잔디밭과 가벼운 산책을 나오신 듯한 그 많은 어르신들이라니.

분석 좋아하는 자칭 사회학자는 공산성의 지형 특색과 진주성의 지형 특색을 요모조모 따져보기 시작한다.


"공산성은 방어적 성격이 강해서 성곽으로 사방을 둘러막고 분지처럼 되어있는 성안에 마을이 생겼다면, 진주성은 길게 펼쳐져있는 느낌이네. 그냥 누구나 드나들기 편하게 탁 트여있는 거 같아."

"공산성은 한번 가려면 한 시간은 산 탈 각오하고 가야 돼서 공주 사람들도 잘 안 가는데 여기는 오기 너무 편하겠다."

"이야, 성 안에 카페도 있고 박물관도 있어. 공산성은 유네스코 지정되고 나서 보수공사 하나 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르신들이 자꾸 사당이랑 동상 앞에서 축원을 비시는데. 절도 아니고 왜 저기다가 비시는 거지?"

"이 등들 불 켜지면 또 다른 분위기겠다. 이따 밤에 또 오자!"


신기한 거 투성이다.

산성, 읍성, 도성을 꽤 다녔던 거 같은데 진주성만의 색이 뚜렷하다.



숙소에서 잠시 쉬고 유람선을 타러 나왔다.

밤운전이 귀찮아 택시를 탔더니 기사님의 진주 자랑이 늘어진다.


"유등축제는 매년 하는 건데도 보고 또 봐도 색다르고 멋져요. 이거 때문에 여러 번 오시는 분들도 많죠."

맞다, 유등.

유등축제를 보려고 진주에 온 것이었다.

유등축제 기간을 잘못 봐서 끝나고 오긴 했지만 진주를 가자 마음먹은 게 유등 때문이었는데.

배를 타고 남강을 한 바퀴 휘 둘러보며 화려한 빛을 뽐내는 유등에 빠져들었다.

찬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진주가 가진 에너지가 화려하다는 생각을 했다.



'에너지가 화려하다.'

이상한 말이다.


진주는 뭔가 화려한 느낌이다.

진주의 사람들은 자부심이 있고 활기차다.

내가 느낀 것이 도시의 색일지 에너지의 색일지 모르겠지만 진주는 화려하고 에너지가 가득 차있다.







이번 여행에서 진주와 공주의 정체성을 비교해 보게 되었다.

공주는 백제의 수도라는 역사성을, 진주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공주 사람들은 공주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이 크지 않은데, 진주 사람들은 자부심이 크다.

왜 다른 것일까.


우리에게 백제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역사이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석이 될 대로 된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했다.

패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길 필요도, 시간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진주대첩은 백성들의 힘으로 이룬 엄청난 승리이며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나은 뼈아픈 고통의 사건이다.

430년 전의 그 사건은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영웅담과 희생담으로 회자되었고 나라에서도 계속 상기시켰다.

임진왜란 때 연락책으로 썼다는 유등이라는 전통이 애국심과 감성을 건드리는 스토리로, 축제 콘텐츠로 성장하면서 진주의 특색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진주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지역 정체성을 뚜렷하게 갖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백제문화제가 있지만 토박이 입장에서는 희여멀건하다.

이러한 비교가 재밌으면서도 씁쓸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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