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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민 Jun 30. 2016

‘경험’과 ‘참여’가 만드는 캐릭터의 가치

평행세계, 데이터베이스 소비와 팬덤의 ‘참여’

지난 4월 27일 개봉한 마블(Marvel) 스튜디오의 신작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Captain America: Civil War)’의 흥행이 심상치 않다. 이미 개봉 5일만에 4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고, 이는 전작인 ‘어벤져스 2’보다 빠른 흥행 속도다. ‘네이버 영화’의 관람객 평점은 9점대(10점 만점), 영화 추천 서비스인 ‘왓챠(Watcha)’ 평점이 4.2를 기록하는 등 관객 평가와 입소문도 긍정적이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2016년 첫 번째 천만 관객 동원을 예상하는가 하면, ‘시빌 워’의 영화관 독점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역시, 마블!”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결과다.


‘시빌 워’의 영향은 극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1년 중 완구 판매가 절정에 이른다는 ‘어린이 날’이 코앞이다. 주요 대형마트는 이미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특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시빌 워’ 관련 상품도 예외가 아니다. 글로벌 완구 기업 ‘해즈브로’도 ‘시빌 워’ 관련 완구를 공식 론칭하는 등 흥행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마블의 캐릭터 상품은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소위 ‘키덜트’라고 불리는 마블 ‘덕후’들은 고가의 캐릭터 피규어 구매도 서슴지 않는다. 오는 5월 22일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마블 런(MARVEL Run)’ 행사도 ‘덕후’ 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조만간 히어로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대규모로 서울 한복판을 달리는 장관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빌 워’의 인기의 핵심은 바로 ‘캐릭터’의 힘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어벤져스’ 시리즈를 통해 이미 ‘아이언 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관계를 지켜봤다. 마블의 캐릭터들에 기반한 영화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마블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사의 주요 캐릭터들을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 ‘라이선싱(권리대여)’ 사업을 본격화 했다. 엑스맨(20세기 폭스), 스파이더맨(소니) 등의 인기 캐릭터들의 권리를 대형 영화사에 대여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마블의 라이선싱 수입은 2000년 1900만 달러에서 2007년 2억 7200만달러로 14배가 넘게 증가했다. 2008년부터는 ‘마블 스튜디오’라는 자체 영화사를 설립,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직접 영화 사업에 뛰어들었고, 올해까지 13편의 영화와 4편의 드라마를 제작했다. 국내에서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 1,049만, ‘아이언맨3’이 900만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길게는 15년, 짧게는 9년이란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블의 캐릭터와 함께 울고 웃었던 것이다.  


평행세계, 데이터베이스 소비와 팬덤의 ‘참여’

흥미로운 것은, 이들 영화들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라고 불리는 세계관을 공유하며, 점차 그 세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MCU의 세계는 마블 코믹스의 분류법에 따르면 ‘지구-1999999’에 해당된다. 영화의 원작에 해당하는 세계도 ‘지구-616’과 ‘지구-1610’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75년의 역사를 가진 오리지널 만화 시리즈에 해당되고, 후자는 2000년대 이후,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리부트(reboot)’된 평행세계 ‘얼티밋 유니버스(Ultimate Universe)’에 해당된다. (이들은 2015년, ‘시크릿 워즈’라는 이벤트를 통해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계관의 공유’와 ‘평행세계’라는 개념이다. MCU에 속한 영화/드라마들은 개별 작품으로도 의미를 갖지만, 더 큰 세계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MCU와 연결된 작품들에서 일어난 사건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관객들은 이러한 연결의 지점을 찾는 것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누린다. 소위 ‘떡밥’이라고 불리는 연결점을 담은 이야기의 조각들은 영화의 개봉 전과 후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되고, 토론과 논쟁을 거치게 된다. 단독 영화의 스토리는 러닝 타임 안에 제한되지만, 마블의 팬들은 작은 조각들을 스스로 연결하며 더 큰 MCU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따라서 영화 관람은 단순히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려가는 세계관의 조각들을 확인하고 더 큰 상상을 펼치기 위한 계기로 변화된다. MCU의 인기의 근간에는 팬덤의 자발적 참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평행세계’의 존재는 ‘원작의 영화화’란 관점에서 접근하는 OSMU(원-소스 멀티 유즈)와는 구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OSMU 개념은 단일한 ‘원본’을 가정하고, 그것의 활용의 차원에 주목한다. 그러나 마블의 작품들은 캐릭터의 이미지만 공유할 뿐, 단일한 원본에 기대지 않는다. 만화책의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영화/드라마의 세계도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간다. 과거의 개념으론 MCU를 ‘원작’의 영화화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미 독립적인 역사를 써내려가는 영화의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원작’으로의 지위를 갖기 시작했다. 마블의 팬덤은 각각의 세계들의 차이를 비교하며, 그 차이를 오히려 즐거움의 소재로 삼는다.


이러한 ‘평행세계’의 존재는 한편으론 거대한 서사를 함께 경험하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면서도, 다양한 서사의 가능성을 동시에 인지하게 만든다. 마블의 캐릭터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한편으론 ‘지구-1999999’나 ‘지구-616’의 이야기의 조각을 맞추는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아이언맨’ 혹은 ‘캡틴 아메리카’의 속성 자체에 주목한다. 마블의 작품들은 다양한 감독, 작가들의 상상력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세계관과 캐릭터성이란 설정을 기반으로 하는 데이터베이스의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서사에 ‘원본’이란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세계는 ‘리부트’ 될 수 있고, 그 결과는 ‘캐릭터’의 역사라는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된다.


이러한 ‘원본 없는 이야기 소비’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일본의 문화비평가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란 개념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트리 모델’과 ‘데이터베이스 모델’을 구분하며, 이야기 구조에 있어서 ‘심층’과 ‘표층’의 관계에 주목한다. 기존 트리 모델에서의 이야기 소비는 표층에 드러난 작은 이야기를 통해 심층에 담긴 핵심 의미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핵심으로 한다. 이때 이야기는 이미 결정된 서사로서의 ‘원본’이 존재하며, 수용자는 이를 최대한 정확히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반면, ‘데이터베이스 모델’에서는 ‘원본’의 존재가 부정된다. 표층의 작은 이야기들은 심층의 데이터베이스의 설정들을 활용한 것이며, 수용자는 이들과 함께 심층의 설정 자체, 즉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소비한다. 오리지널과 카피는 모두가 동일한 데이터베이스에서 파생된 ‘시뮬라르크’로서, 원리적으로 우열과 위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데이터베이스 모델에서 수용자의 즐거움의 원천은 ‘원작’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뮬라르크’가 참조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함으로써 스스로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데 있다.


따라서 마블의 인기는 단순히 잘 만든 ‘작품’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마블은 영화, 드라마, 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양한 ‘시뮬라르크’를 보여준다. 각각의 작품은 ‘원작’으로의 지위를 주장하기보다, 다양한 방식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데이터베이스로서 캐릭터의 가치를 축적하는 것에 기여한다. 이는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이야기 한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과도 유사하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전통적인 서사의 구조를 넘어서서 거대한 세계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서 독자, 혹은 관객은 전통적인 수용자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데 기여 한다. 결국 마블의 인기는 팬덤의 적극적인 ‘참여’를 얼마나 잘 이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캐릭터의 지적 재산권은 마블이 가지고 있지만, 그 가치를 축적해온 것은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해 온 팬덤의 역할인 것이다.  



한국의 디즈니가 현실이 되려면

캐릭터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기업이 바로 월트 디즈니 컴퍼니(이하 디즈니)다. 디즈니는 캐릭터 산업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블의 인기 캐릭터들의 IP(지적재산권)을 가진 회사는 다름 아닌 디즈니다. 마블 엔터테인먼트는 약 5,000개의 슈퍼 히어로 캐릭터를 바탕으로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기업으로, 2009년 9월 디즈니에 40억 달러(약 5조원)에 인수되었다. 디즈니가 2015년도에 캐릭터 라이선스 사업 등으로 벌어드린 매출은 45억 달러(5조 1,400억원)에 달한다. 이미 디즈니는 지난 12월, 10년 만에 극장 영화로 돌아온 ‘스타워즈’ 흥행과 더불어 관련 상품 매출을 급격히 신장시킨 바 있다. 유통업, IT업계, 패션업체 등 다양한 품목의 ‘스타워즈’ 관련 상품이 영화 개봉과 더불어 높은 매출을 기록했고, 관련 상품 매출은 세계적으로 50억 달러(5조7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많은 콘텐츠 기업들이 최종적인 목표를 ‘디즈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디즈니’가 어떻게 해야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최근 한국의 주요 게임 기업들은 마블의 ‘캐릭터’ 활용 전략을 조금씩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리니지’로 유명한 엔씨소프트(NC soft)의 ‘MXM(Maser X Master)’이 대표적인 사례다. ‘MXM’은 엔씨소프트가 그동안 출시했던 주요 게임의 인기 캐릭터들이 총 출동하는 올스타전과 같은 개념의 게임이다. 엔씨소프트는 2015년에 ‘묵화마녀 진서연’이란 게임 캐릭터를 활용한 뮤지컬을 선보이기도 했다. 넥슨(NEXON)도 인기 온라인 게임 ‘메이플 스토리’의 캐릭터를 활용한 ‘프로젝트 MNP’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IP(Intellectual Property) 활용의 흐름은 이미 2015년부터 시작된 바 있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를 활용해서 인기를 끌었던 ‘프렌즈팝’이 출시된 것도 2015년 8월의 일이다.


이러한 IP 활용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당 IP, 즉 캐릭터의 인기가 필수적이다. 최근 어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국산 캐릭터들의 특징 중 하나는 게임과 메신저 이모티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게임은 정해진 서사를 따라가기보다, 이용자가 캐릭터를 조작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모티콘은 아예 정해진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탄생과 관련된 ‘설정’은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대부분 사용자의 ‘대화’의 맥락에서 발생한다. 카카오 프렌즈, 라인 프렌즈 등은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과정 안에서 중요한 매개체로서 역할을 담당하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이모티콘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의미 있는 소통을 지속해왔다.


캐릭터는 결국 나와 가상적인 상호작용을 했던 핵심적인 상징들이라 할 수 있다. 캐릭터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 안에,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조각들이 녹아 있다. 이들의 인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들이 사람들의 일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그 경험의 축적과 참여의 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캐릭터의 힘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참여’를 통해 축적된 경험의 두께에 있다.


디즈니, 그리고 마블의 힘은 바로 그러한 참여를 이끌어내고, 그 저변을 넓혀가며, 그 가치를 적절히 축적하고 활용하는 역량으로부터 나온다. 캐릭터 가치의 본질은 디자인이 아닌, 이용자의 참여에 기반한 경험의 축적에 있는 것이다. 한국의 디즈니가 가능하기 위해선, 이러한 사람들의 ‘경험’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단순히 ‘캐릭터 산업’으로 접근하기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콘텐츠 지식재산(IP) 산업’이란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 콘텐츠 IP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보다 전문적이고 전략적인 경영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캐릭터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상품화하는 것을 목표로 작품을 기획한 것은 불과 1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뽀로로’를 보고 울음을 그친 아이들은 ‘타요’와 ‘폴리’ 등을 섭렵하며 점점 다양한 영상들을 만난다. 새롭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디어스케이프(mediascape)’는 그 중심에 우리의 캐릭터들이 있다. 수년 후, 혹은 수 십년 후에, 우리의 아이들은 다른 나라의 친구들과 '뽀로로'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며 관계를 맺어나갈 날이 올지도 모른다. 조급증을 갖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저변을 넓혀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들이 더 많이 함께 즐기고, 삶을 공유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콘텐츠가 더 오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


글| 이성민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산업연구실 연구원)

2016.5.2.

*이 글은 문화관광연구원 웹진 5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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