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놀이, 키덜트 콘텐츠, 유튜브
1. 펭수 열풍을 만들어낸, 문화 산업의 저변을 살피다
2019년 하반기를 강타한 ‘펭수’ 열풍은 2020년에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의 타종을 펭수가 맡은 것은 상징적이다. 펭수 굿즈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펭수 영상을 돌려보며 새롭게 ‘입덕’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는다. 펭수의 상표권을 타인이 먼저 등록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담은 특허청의 유튜브 영상은 21만 조회수를 넘어섰다.(해당 채널의 일반적인 조회수가 수백건인 것에 비교하면, 펭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수준을 상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표 분쟁은 앞으로 벌어질 펭수 연관 ‘산업’에 대한 대중의 기대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에서 굿즈, 각종 컬래버레이션으로 이어지는 펭수의 활동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갑작스러운 펭수 열풍은 여러가지 ‘설명’을 요구하는 일종의 ‘현상’이다. 많은 글에서 펭수의 거침없는 언행이 주는 쾌감, ‘펭수는 그냥 펭수’라는 말로 대표되는 세계관의 구축 등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펭수가 유난히 ‘잘 해낸 점’들에 대해선 이미 충분히 많은 설득력 있는 설명이 나와 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선 어떤 토대 위에서 이러한 성공의 지점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에 더 주목해보고자 한다.
즉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펭수가 소위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펭수는 지난 5년간, 한국의 문화 산업에서 다양한 차원으로 성숙해온 콘텐츠IP 생태계의 토대 위에 우뚝 서 있다. 펭수의 성공 사례를 계기로 현재 한국의 문화 산업의 저변에 흐르는 문화적, 산업적 트렌드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더 늘어날 또다른 ‘펭수’들의 가능성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펭수 열풍이 보여주는 문화-산업 트렌드 (1): 가면놀이, 디지털 정체성, 세계관
펭수가 EBS와 유튜브를 벗어나 타 방송으로 진출하면서 기존 방송인들에게 가장 낯설게 받아들여진 부분은 바로 ‘펭수는 펭수다’라는 표현이었다. 일반적으로 펭수와 같은 캐릭터는 ‘인형탈을 쓴’ 인간 연기자의 행위로 받아들여져왔다. 그렇기에 펭수의 인기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펭수를 ‘연기’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펭수는 그 선을 넘지 않는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펭수라는 캐릭터에 머무르는 전략을 취하고, 팬들이 그러한 선택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펭수를 캐릭터 그 자체로 소비하는 것이다.
여기에 미묘한 이중성이 작동한다. 분석을 위해 세계관 감수성을 잠시 무시하자면, 펭수를 연기하는 연기자의 실존과 펭수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캐릭터는 때로는 융합하며 때로는 분열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체성의 분열을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문화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면은 다중 정체성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가면의 매력은 이미 오랜 역사성을 갖는 일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한 개인에게 통합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정체성의 복합성을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하고, 허용되는 문화가 보다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해볼만 하다. 복면가왕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글로벌 시장에서 포맷으로 판매되며 흥행하고 있는 현상과 펭수 현상의 연결성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통합될 것으로 기대되나 실제론 복합성을 갖는 인간의 정체성을 구분하여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다수의 대중에게 허락해주었다. 소셜 미디어에서의 나와 실제의 나의 차이를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환경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틈을 타고, 소위 ‘부계(부계정’, ‘부캐(부캐릭터)’란 용어가 디지털 문화의 한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중의 소셜 계정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의 다양한 차원을 구분하여 관리하는 사례들이 일반인들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에게 기대되는 정체성과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 간의 충돌을 충분히 관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오프라인-일상’에 비해, 이를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캐’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사례가 바로 MBC 예능 놀면 뭐하니의 ‘유산슬’이라고 할 수 있다. 유재석이라는 ‘본캐’와 ‘유산슬’, ‘유고스타’라는 다수의 ‘부캐’를 동시에 관리하며, 그 간극에서 나오는 해프닝을 웃음의 포인트로 삼는 전략인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국민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도 사실상 ‘캐릭터’ 플레이로 받아들여져왔다. ‘기믹’, ‘캐릭터’라는 개념들은 이미 하위문화의 중요한 용어로 자리잡고 있었다. ‘리얼 예능’의 전성기를 거쳐오면서, 오히려 ‘리얼’은 콘텐츠 내의 캐릭터 구축의 리얼리티의 문제, 즉 리얼리티의 연행의 차원으로 그 의미가 이동해왔다. 리얼 예능의 위기는 콘텐츠 내부에서 구축된 ‘리얼리티’와 그 외부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제가 충돌할 때 찾아왔다.
‘부캐’라는 정체성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주체로 ‘유재석’이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수의 정체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으면서도, ‘본캐’의 우발적 드러냄에 따른 세계관의 붕괴 위험이 적은, 가면 쓰지 않은 개인은 현실에 그렇게 많지 않다. 역시나 캐릭터를 ‘연행(perform)’하는 아이돌에게서도 유사한 상황들이 나타난다. 기대되는 정체성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기적으로 조율하고 연합하며 서사를 구축하는 일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셀럽’의 역량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 가면과 탈이란 장치는, 이러한 실존과 세계관으로 구축된 ‘리얼리티’의 충돌과 균열을 방지하는 효과를 갖는다. 펭수의 과감한 선택들이 대부 이러한 ‘가면’이 가져다 준 관리 가능한 정체성의 기회로 부터 나온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익명의 공간에 숨은 개인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솔직한 발화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펭수는 가면이 주는 안전함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마음에 담고 있으나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다수의 발화를 대신 해낼 수 있다. 그렇기에, 다시 ‘펭수는 펭수’라는 명제로 돌아오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선택된 정체성으로서 하나의 ‘가면’이 현실에 공존하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한편으론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부여될 것을 기대하고 열망한다. 가면 쓴 개인을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기회를 얻은 이에게 자신의 열망을 투사하는 대중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학력, 세대, 직업 등 몇가지 정체성의 표지를 확인해야, 즉 ‘가면을 벗겨야’ 상대를 대할 수 있는 이들에겐 불편한 일이겠지만, 자신이 선택한 코드를 통해 자신이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며, 그 코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익숙한 이들에겐 반가운 일인 것이다.
2. 펭수 열풍이 보여주는 문화-산업 트렌드 (2): 키덜트 문화와 캐릭터-콘텐츠의 연계
펭수 열풍이 화제가 된 또 다른 원인 중 하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기획된 작품이 2030 세대, 소위 ‘어른이’의 열광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2030 세대의 ‘캐릭터’에 대한 열풍은 지난 몇년 간 ‘키덜트’라는 키워드로 이해되어 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현재의 소비로 당당히 복귀하고 있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캐릭터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이제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서점의 매대 한 편에는 ‘라이언’, ‘미키마우스’, ‘보노보노’, ‘곰돌이 푸우’, ‘빨간머리 앤’과 같은 캐릭터들을 표지에 담은 책들이 우리를 ‘위로’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펭수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 옆에 ‘라이언’이란 캐릭터가 종종 함께 논의된다는 것이다. 라이언이란 캐릭터의 인기 비결로, 표정없는 얼굴이 지적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역시나 표정이 고정되어 있는 펭수의 인기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펭수의 ‘짤’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은 펭수의 하나 뿐인 표정에 자막을 입힌 영상들이 다양한 감정을 담은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펭수는 소위 감정을 ‘투사’하기 좋은, 도화지 같은 면을 가진 캐릭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어른이 되어서도 캐릭터에 무엇인가 감정을 투사하고, 캐릭터에게 위로받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키덜트 문화의 저변 위에서 펭수에 대한 열광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펭수의 대중적 인기를 촉발시킨 콘텐츠가 ‘E육대(EBS아이돌 육상 대회)’였다는 점도 현재 키덜트 문화의 저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E육대는 한편으론 2030 세대의 추억을 환기시키는 장치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대중문화는 현재 콘텐츠 산업의 주요 소비층인 2030 세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중요한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유튜브에서 과거 대중 음악 영상이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채널에 모여 함께 수다를 떠는 ‘온라인 탑골공원’의 인기는 콘텐츠 분야의 ‘레거시’의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육대’ 영상에서 함께 출연한 캐릭터 들이 대부분 ‘인형탈’ 그 자체라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해당 영상은 펭수가 EBS가 키즈 콘텐츠 분야에서 오랫동안 제작해 온 ‘인형탈’과 캐릭터를 활용한 콘텐츠의 전통 위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세계관’을 묶어주었다. 다만 펭수는 기존의 인형탈 활용 캐릭터 콘텐츠가 전문 성우의 ‘더빙’을 통해 캐릭터를 구축했던 것에 비해, 연기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긴다는 점에서 자율성과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보다 잘 반영된다는 점에서 한층 진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형탈’을 활용한 캐릭터 콘텐츠 제작은 키즈 콘텐츠 분야에선 흔하게 시도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니메이션 기반의 캐릭터의 경우, 높은 제작비 문제를 해결하면서 팬덤과의 접촉을 넓히기 위해 이러한 ‘인형탈’을 활용한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뽀로로, 핑크퐁, 미니특공대 등 다수의 작품들이 이러한 ‘인형탈’ 영상을 제작, 유통한다. 한편에선 크리에이터의 인기를 수익화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IP-캐릭터화를 시도한다. 캐리 프렌즈는 캐리, 엘리, 케빈 등 주요 출연자를 ‘꼬마 캐리’와 같은 ‘인형탈’ 캐릭터로 만들어 함께 출연시키고, 이를 브랜드 상품으로 전환해서 라이선싱 수익을 거둔다. ‘바나나차차X모모랜드’ 영상과 같이 최근 유니티와 같은 게임 엔진을 활용하여 이러한 ‘인형탈’을 CG 캐릭터로 실사 촬영분과 합치는 시도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중적으로 접근 가능한 캐릭터-콘텐츠 전략으로 ‘인형탈’의 활용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화려한 드러밍으로 화제가 되었던 일본 아이모리 현의 ‘냥고스타’ 캐릭터 역시 이러한 ‘인형탈’ 활용 콘텐츠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키덜트 세대가 열광하는 기존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이들이 콘텐츠로 제작될 경우의 시장성이 충분히 담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산업과의 연결성이 강한 기존의 한국 캐릭터 산업 생태계에서, 성인 관람율이 낮은 애니메이션과 같은 콘텐츠를 확대하는 것은 확고한 캐릭터 팬덤이 부재한 상황에서 쉬운 선택이 아니다. 따라서 메신저 등을 통해 어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라 하더라도, 그 서사를 이어가며 접촉면을 넓힐 ‘콘텐츠’로 변신할 기회를 얻기란 제한적이다. 카카오프렌즈와 라인프렌즈도 이제서야 애니메이션 제작 소식이 들려오는 것도, 일반적인 캐릭터-콘텐츠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콘텐츠의 시장성에 대한 확신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펭수는 성인이 매력을 느낀 캐릭터가 콘텐츠를 통해 서사와 세계관을 구축하며 팬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사례라는 점에서 현재의 콘텐츠 산업 지형에서 흔치 않은 사례임 셈이다.
펭수의 인기는 ‘키덜트 캐릭터’의 산업적 가치를 증명한 사례란 점에서 향후 키덜트 캐릭터 기반의 콘텐츠 제작의 가능성을 높여줄 가능성이 있다. 인형-탈 캐릭터와 인간-연기자의 동반 출연에 대한 성인 시청자의 문화적 거부감이 줄어들면, 향후 키덜트 기반의 캐릭터 콘텐츠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2.5차원’이란 개념으로 이러한 ‘인형-탈’ 활용 콘텐츠가 광범위한 IP생태계 전략으로 논의된 사례가 있다.(3차원이 현실, 2차원이 애니메이션이란 관점에서 그 중간적 위치인 실사화된 캐릭터 연기를 ‘2.5차원’이라 표현한다.) 이는 게임 엔진 기술을 활용한 실사와 CG의 자연스러운 융합이 보다 저렴해지는 제작 환경이 확대되어가는 현재 상황에서, 미래 콘텐츠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펭수 열풍이 보여주는 문화-산업 트렌드 (3): 유튜브 시대의 디지털 소통
마지막으로 살펴볼 트렌드는 바로 ‘유튜브’가 중심이 되는 문화산업 환경이다. 2020년 현재 한국의 미디어-콘텐츠 생태계에서 유튜브는 특정한 서비스의 브랜드라기 보다, 하나의 ‘인프라’와 같은 역할을 한다. 보니하니라는 EBS의 간판 키즈 콘텐츠의 일부로 편성되었던 자이언트펭TV가 유튜브를 기반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는 와중에, 바로 유튜브 라이브로 붉어진 스캔들로 본편에 해당하는 보니하니가 일시 중단되었던 사례는 상징적이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삼은 펭수는 기존의 방송사 간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미디어로 자유롭게 흘러다닌다. 미디어의 경계를 중심으로 콘텐츠가 구축되던 시대를 넘어, 콘텐츠가 주도해서 미디어를 활용하는 힘의 역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연성을 가능하게 한 ‘인프라’가 다름아닌 ‘유튜브’인 것이다.
펭수의 메인 채널인 ‘자이언트 펭TV’는 최근의 방송-미디어 생태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략이라 보긴 어렵다. 유튜브의 영향력이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방송사들은 별도의 디지털 스튜디오를 구축하거나, 기존 콘텐츠의 유튜브 채널을 동시에 운영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펭수의 인기가 폭발하기 전까지 2019년의 미디어 트렌드를 대표하는 사례가 JTBC 계열의 디지털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워크맨’과 ‘와썹맨’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CJENM의 나영석 PD도 ‘채널나나나’를 통해 구독자 이벤트를 하고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고, 유튜브가 중심이 되는 ‘아일랜드간 새끼’와 같은 작품들을 흥행시켜왔다. 즉 2019년도를 기점으로 디지털-숏폼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주도권을 잡아가는 환경 속에서, 그러한 전략과 문법을 채득한 젊은 제작진의 시도 중 하나로 자이언트 펭TV가 존재했던 것이다.
유튜브 기반의 디지털-숏폼 생태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협찬-광고’의 적극적인 활용과 ‘컬래버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직까지 유튜브 광고 수익 만으로는 채널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디지털 영상의 장점을 활용, 네이티브 광고나 브랜디드 콘텐츠와 같은 전략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결과였다. 유튜브로 유입된 시청자들은 이러한 수익화 전략에 대해 부정적이기 보다, 오히려 새로운 콘텐츠의 요소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문화를 보인다.
컬래버레이션도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특히 펭수의 경우 협력의 주체의 측면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자이언트펭TV는 외교부와 보건복지부와 협력한 영상으로 화제를 모았고, 그 뒤로 다른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섭외 요청도 이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유튜브 채널의 댓글 기능을 통해 섭외 요청을 시작한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협력을 요청하고 성사시키는 것은 민간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례들은 최근 유튜브가 중요한 홍보의 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 모두 홍보를 담당하는 조직에서는 유튜브 채널을 직접(혹은 외주를 통해] 관리하고, 그 성과를 위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홍보활동을 전개한다. 전통적인 광고에 비해, 젊은 층에 소구한다는 점을 무기로 파격적인 시도들에 대한 사회적 용인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들에게 강력한 팬덤을 가진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은 이미 중요한 전략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펭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인플루언서라는 강점을 가진다. 최근 이슈가 되는 "광고주 안전성"의 관점에서, 홍보 주체의 브랜드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인플루언서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고 있다. 특히 유튜브 기반의 인플루언서에게서 수시로 사회적 물의가 일어날 수 있다는 문제는 중요한 리스크가 된다. 이때 교육방송이라는 주체가 가이드라인을 관리하는 인플루언서인 "펭수"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플루언서와 홍보수요자의 긴밀한 관계는 채널의 지속가능한 운영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협력을 통해 탄생한 영상은 외주의 형태로 납품되는 것이 아니라, 인플루언서의 자체 콘텐츠의 라이브러리를 늘리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지속적인 컬래버레이션이야 말로 유튜브 채널의 수익 모델이자, 콘텐츠 제작의 기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유튜브 문화의 요소는 다름아닌 소통과 커뮤니티의 구축이다. 팬덤과의 적극적 소통은 유튜브 주도의 디지털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유튜브는 단순히 영상을 올리고 끝나는 곳이 아니라, 영상 업로드를 시작으로 하는 소통 자체가 중요한 곳이다. 유튜브는 구독, 알람, 댓글 등의 기능들을 통해 끊임없이 시청자의 참여(engagement)를 유도한다. 다만, 이러한 소통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영상과 달리, 해당 채널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적극적 이용자인 팬덤을 대상으로 한다. 이미 다수의 개인 방송 및 인플루언서가 자신의 팬덤에게 말 거는 방식인 "펭-하"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은, 펭수가 이러한 유튜브 팬덤의 소통 양식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돌과 인플루언서의 팬덤 문화는 이미 펭수의 시작부터 뿌리깊게 각인된 요소이다. 연습생 이라는 정체성, 부가영상과 라이브 방송과 같은 직접적인 소통 요소의 활용 등 소위 "덕질"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은 자이언트 펭TV와 펭수의 행보 사이사이 마다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펭클럽"이란 이름으로 구체적인 팬덤에 대한 "호명"을 서슴지 않는다. 팬사인회 영상도 이러한 팬덤-아이돌의 재현을 강화하는 장치가 된다. 최근 본격화 되고 있는 "굿즈"의 판매는 이러한 생태계의 완결성을 가져온다. "덕질하는 팬덤"을 가진 아이돌이자 인플루언서이면서, 비-인간(캐릭터) 주체의 활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디지털 콘텐츠 생태계야말로, 펭수의 인기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반인 것이다.
4. 나가는 글: 펭수를 통해, 한국적 콘텐츠IP 생태계의 미래를 엿보다
최근 한국 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뽑으라면, 주저없이 ‘콘텐츠IP’와 ‘팬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 간 경계가 약화된 디지털 생태계에서 콘텐츠IP를 기반으로 한 팬덤은 산업의 판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수용자를 묶어주는 역할을 과거에는 특정한 미디어가 담당했다면, 이제는 콘텐츠IP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콘텐츠IP와 이들을 중심으로 한 팬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산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콘텐츠와 미디어 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은 각각의 고유한 콘텐츠IP 생태계와 문화를 보여준다. 소위 ‘긱(Geek)’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코믹스IP-팬덤이나, ‘오타쿠'로 대표되는 일본의 애니/아이돌-팬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부분 특정한 시기의 미디어 환경과 콘텐츠의 성격, 그리고 이와 결합한 팬덤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고유한 콘텐츠IP와 팬덤의 관계가 존재하며, 이는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 생태계의 확장과 함께 보다 전면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단적인 사례로, BTS와 그 팬덤 ‘아미'는 디지털 미디어 문화의 요소들을 듬뿍 담고 있는 한국적 팬덤 문화의 많은 요소들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엔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맺기의 방식(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수평적이며 소통적인 관계 맺기), 굿즈나 펀딩과 같은 팬덤-아이돌의 경제적 기여의 방식, 커뮤니티의 방식으로 팬덤을 호명하는 아이돌과, 이들의 사회적 명성을 ‘매니지먼트'하는 관리형 팬덤의 결합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한국적 팬덤 문화의 저변이 아이돌 산업을 넘어, 콘텐츠IP 전반으로 확대되며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콘텐츠 산업이 앞으로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러한 콘텐츠IP-팬덤 문화의 작동 방식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한국의 콘텐츠IP 생태계는 역할극, 소통, 영상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특유의 콘텐츠 IP-유니버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펭수의 성공은 현재 한국의 콘텐츠 산업 전반에 자리잡고 있는 콘텐츠IP-팬덤의 관계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문화를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례다.
많은 성공이 그러하듯, 펭수의 성공도 한국의 콘텐츠 산업과 대중문화가 그동안 쌓아올린 문화-산업적 저변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많은 사업자들이 콘텐츠IP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한 전략들을 고민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펭수가 그랬듯이, 앞으로 다양한 콘텐츠IP 프로젝트들에서 한국적 맥락이 만들어낸 특유의 성취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이 글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문화관광웹진' 2020년 1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