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짜 뇌졸중 환자가 들려주는 뇌졸중 경험담

일반병실로 오다

뇌졸중 환자의 일반병실은 타 과 일반병실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있던 병원은 '신경외과집중치료실'이라는 이름의 병실이 신경외과 일반병실이었는데 시끌시끌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매우 고요하고 절대 안정을 요하는 병실이었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부린 난동(?)으로 면회객출입이 금지되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웃음). 일반 병실에 가서도 나의 이상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이상한 행동 이라할 것 까진 없지만 누가 봐도 ‘이상한 애’인 것만은 확실했다. 일반 병실에 가자마자 엄마께서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먹기 좋은 음식을 섭취하면 텅 빈 속에 부담이 덜되겠다는 마음에 잘 익은 망고를 잘라 주셨다. 열흘을 빈속으로 지낸 내가 걱정되셨나 보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나는 모든 먹는 것을 거부했다. 수액과 약의 영향도 있겠지만 계속되는 두통으로 가만히만 있어도 울렁거려서 아무것도 먹기가 싫었다. 씹고 먹고 삼키고 하는 활동을 열흘 동안 안 해서였을까, 갑작스런 음식물에 속이 놀란 탓일까. 나는 망고를 삼키자마자 전부 토해냈다. 몸에서 음식물을 자꾸 거부해서 어떤 것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가려지는 커텐은 나를 덮쳐 감싸버리려는 보자기 괴물 같았고, 나에게 점점 다가오는 듯 했다. 가만히 있다간 커튼에 휘감겨 위험할 거라는 생각과 커텐 너머로 들리는 다른 환자의 목소리가 나를 위협하는 듯해서 나는 커텐을 있는 힘껏 걷어 버리고는 "거참, 조용히 좀 하지"하고 소리쳤다. 5인실이었는데 남의 집 문을 벌컥 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는 나의 돌발 행동에 놀랐고, 우리엄마는 연신 “죄송합니다” 라고 말씀하셔야 했다. 그래도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으셨는지 “처음에 (일반 병실로) 올라오면 다 그래~ 편하게 있어~”하며 감사하게도 많이 이해해 주셨다.

내 몸과 연결된 각종 수액 줄들을 확인하러 오는 간호사들에게는 솔로로 지내던 나의 남사친들 걱정에 “선생님, 남자친구 있어요? 소개시켜 줄까요?” 가 기본 인사였고, 대학 시절 학교 앞에서 팔던 단호박 라떼에 꽂혀 “선생님, 이 근처에 단호박 라떼, 어디서 팔아요?” 하며 제조법까지 설명해주며 똑같은 단호박 라떼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질문은 고정 멘트였다. 나의 황당한 질문 세례에 간호사들은 매 번 처치 후 재빨리 퇴실했다. 내가 있는 병실을 정말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옆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엄마와 남편은 돌아온 듯, 돌아오지 않은, 살아있지만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기는 한 딸과 아내를 보며 혼란 속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편은 누워있는 것밖에 못하는 나를 위해 내가 쓰던 휴대폰을 가져다 줬다. 나는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는지 복시로 잘 보이지도 않는 핸드폰 글자를 보며 오른손만으로 어찌어찌 터치해가며 사람들에게 쓰러졌다고 오타 가득한 메시지를 보내기 바빴다. 당연히 안부를 묻는 정상적인 메시지는 아니었고, ‘아..ㅁ흐러ㅓ저ㅓ써ᆡᆡ요(쓰러졌어요)’ 정도의 메시지를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쓰러지던 날 친구들과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고, 그 주말엔 꼭 가야하는 친구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뇌가 다치고도 어딘가 계속 약속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남편이 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는지 정작 약속이 예정된 친구들에겐 연락을 안했다는 거. 약속을 어긴 것이 미안했던 듯 싶다.


일반병실에서는 안정을 취하면서 계속해서 인지 상태가 좋아졌다. 제법 대화가 되고 휠체어에 앉아 밥 먹을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식욕은 없었고 맛있는 반찬이 나오는 날만 숟가락을 조금 들 뿐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항상 내가 먹고 싶다는 음식들을 사다 주셨다. 그 때부터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뇌출혈로 내게 남은 후유증들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물체가 겹쳐 보이는 복시로 인해 침대 맞은편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면 멀미가 났다. 반복되는 패턴과 많은 숫자, 글자를 보면 어지러웠다. 그런 어지러움을 느끼고 나면 방전된 핸드폰처럼 기운이 빠져 힘없이 쳐졌고 잠이 왔다. 딱히 시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못 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들도, 의료진도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환자복에 새겨진 무늬만 봐도 멀미가 날 정도였는데. 나의 투정 같은 불만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여러 사건의 이력이 있던 나의 말을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복시 증상은 내게 남아있고, 사시까지 생겼다. 갈수록 나아지고 있지만 양쪽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뿌옇게 여러 개로 보인다. 그래서 정확히 보려면 여전히 한 눈을 가리고 봐야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가장 큰 후유증인 편마비. 앉아 있으면 마비 측으로 몸이 스르륵 흘러내리고 서있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화장실 변기에 옮겨 앉는 것조차 안 되니 늘 기저귀를 하고 누워 있었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지만 누워서 소변을 보고, 남편에게 뒤처리를 부탁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정신적 스트레스는 거기서부터 온 듯하다. 일종의 수치심 같은..? 성품이 매우 착한 남편은 늘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배뇨조절이 안 되다 보니 실수하는 일도 잦아서 침대 커버와 환자복을 수시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그런 와중에도 남편을 늘 괜찮다고 해주었다. 고마운 남편. 그렇게 정신없이 말도 안 되는 하루를 어찌저찌 보내고 저녁이 되면, 어두워진 하늘과 함께 내 기분도 가라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아기와 간이침대에서 웅크리고 자는 남편, 숨 막히는 병원의 공기까지. 밤에 누워 병실을 한 바퀴 둘러볼 때마다 눈물홍수가 났다. 6개월 된 갓난아기를 위해 친정엄마, 시어머니가 생업을 포기하고 본인들의 삶을 아기에게 보태주셨다. 그 덕분에 그 아이는 건강하고 밝은 5살 남자아이가 되었다. 나를 간병하기 위해 남편은 급하게 휴직했고, 나의 곁을 지켜주었다. 가족들의 고생이 눈에 훤해서 고맙기도 했지만 나는 나의 회복이나 퇴원보다는 죄책감이 컸다. 그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고, 남편은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뇌졸중 극복 사례나 운동 영상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 영상들이 지금의 의지나 재활지식을 갖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너도 이렇게 해야 돼’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여겨져서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내가 온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 것이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내가 죄인이 된 것만 같아 그런 상황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뇌졸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이렇게 한 달만 지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대학병원에 입원 할 수 있는 기간이 한 달이라 한 달을 목표로 잡았었다.) 우리 가족도 전혀 뇌졸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재활치료를 받고 건강을 좀 더 찾으면 다 지나간 일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한 달이 되고 나의 몸은 여전했고, 오히려 못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직접 더 잘 느끼게 되면서 이제는 세상을 원망하고 좌절하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필 나에게’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아직 뇌에 대한 치료가 안 돼서, 아직 기형혈관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의료진을 탓하곤 했다. 왜 나를 빨리 안 고쳐 주냐며.(치료법을 정하는 데만 한 달 반이 걸렸고, 기형혈관이 제거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렇게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서만 생활을 하게 되었고, 신랑도 병원에서 쪽잠을 자며 나를 간병해주었다. 그리고 구두를 즐겨 신던 나는 퇴원하는 날만을 기다리며 퇴원할 때 어떤 구두를 신고 나갈지, 어떤 구두로 걷는 연습을 할지, 무슨 구두를 새로 장만할지 상상하며 일반병실(신경외과 집중치료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퇴원할 때 무슨 구두를 신었냐고? 구두는 무슨~ 운동화도 제대로 못 신고 슬리퍼나 샌들은 꿈도 못 꾸는 채로 퇴원했다.


일반병실에서부터 환자들의 고통이 직격탄으로 온다고 본다. 그 정신적 고통의 정도에 따라 이상증세가 발현되는 것 같다. 가장 잘 체크해 주어야 하는 것이 발병 전과 유난히 달라진 신체 문제들이다. 당연히 모든 것이 달라져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일반병실에서부터 복시가 있었지만 '나아지겠지' 하며 방치했고 3년이 지나서야 해결하려고 했다. 그 사이에 복시로 인한 사시가 더 심해졌고, 만성후유증으로 자리잡아버렸다. 한번은 병실에만 갇혀 지내는 내가 안쓰러웠던 엄마가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구경을 시켜주셨다. 안내판들의 글씨, 수많은 사람들이 겹쳐 보이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시각적 자극에 과부하로 두통이 왔고, 참으라며 별거 아니라는 엄마의 등살에 겨우 버티다가 병실에 오면 쓰러져 잤다. 뇌가 과부하 걸리면 걸릴수록 잠이 쏟아진다. 그만큼 뇌가 쉬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감각에 관한 것. 나는 시상이라는 곳도 손상되어 감각을 확실하게 느끼지 못한다. 초기에는 여러 가지 자극이 좋다는 말에 엄마께서는 혈액순환과 자극이 되라고 마른 수건으로 박박 문질러주셨고, 감각을 이상하게 느꼈던 내게는 그 자극이 찌르는 통증이 되어, 만지기만 해도 모든 자극을 통증으로 느끼는 이상감각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통증으로 느끼거나 먼저 들어온 자극의 잔존감이 크거나 하는 등의 감각문제가 있다. 여자의 경우 호르몬 문제도 잘 체크해두는 것이 좋다. 건강을 위한 기본 생체 시스템이기 때문에


일반병실에서의 팁!

- 발병 전과 다른 신체의 문제 체크해주기(특히 눈, 식욕, 호르몬 등)
- 모든 자극은 천천히!(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등)
- 뇌가 활동한 만큼 잠이 온다(환자가 자려고만 하는 건 당연하다)
-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 중요(떨어진 감각만큼 상대의 기운과 에너지를 더 잘 느낀다)
- 초기에는 할 수 있는 운동이 없다. 신체 곳곳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어느 부위인지 알려주고 손 접었다 펴기, 발 들었다 내리기를 천천히 반복해주자(재활에 큰 도움이 된다)
늘 상황 설명을 해주기(치료실 갈 때, 밥 먹을 때 지금 뭘 할 것이고 어떤 걸 할 것이다. 미리 알려주면 환자의 혼란스러움과 소란을 덜 수 있다)

결론 : 모든 것에 아이를 대한다고 생각하기

keyword
이전 02화진짜 뇌졸중 환자가 들려주는 뇌졸중 경험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