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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Aug 25. 2018

049. 와이파이맨

느린 와이파이도 감지덕지였던 지난 여행 나날을 추억하다.

  나는 여행할 때 유심을 사거나 로밍을 하지 않는다. 숙소의 와이파이만으로도 충분하다 느꼈고, 여행 중에는 핸드폰 속 세계에 몰입하고 싶지 않았다. 온 정신을 직접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에 여러 나라를 가는 건 처음이고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여행을 가는 것도 처음이기에 5GB짜리 쓰리심 유심을 구입했다. 유심을 사면서 '구글 맵 이외에는 절대로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물론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아 깨졌다.

  유럽에서 가장 당황한 점은 와이파이도 속도가 우리나라에 비해 현저히 느리다는 점이다. 심지어 숙소에 마련된 와이파이도 리셉션 근방에서나 잘 되지, 침대에서는 신호도 잘 안 잡혔다. 심지어 내가 묵었던 호텔에서는 방에서는 무선 인터넷이 잘 안 잡혔다. 그럴 때마다 그토록 느리다는 쓰리심 3G 속도가 참 빠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쓰리심은 무제한이 아니었고,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사흘 정도 지나니 동유럽의 무선 인터넷 속도도 나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서울에서의 삶에서라면 울화통이 터졌겠지만, 여행 중에는 괜찮았다. 스스로 괜찮다고 느꼈음에도 어느새 나는 여행 중에 와이파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로 변했다. 아무리 느린 와이파이라도 나에게는 초 광속 5G처럼 소중했다. 심지어 그 느린 슬로바키아 열차 내 와이파이도 체감속도는 우리 집 와이파이와 필적했다.

  지금 한국에서 그 속도의 인터넷을 쓰라면 차라리 안 쓰고 말겠지만, 그때의 난 그 속도의 와이파이도 너무나 감사하게 사용했던 와이파이맨이었다. 동유럽의 압도적인 풍광과 여행이라는 여유로운 분위기, chilled-out 바이브가 그토록 느린 와이파이도 나쁘지 않게 느낀 것 아닐까. 반대로 우리나라의 지나치게 빠른 무선인터넷을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낀 것 아닐까? 무선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카페를 옮기고 했던 나의 행태를 되돌아보며, 오늘 내 하루하루의 모든 것이 충만하다고 느끼며 이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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