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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Nov 17. 2018

059. 미대생 야작 체험기-하

미대생의 삶은 정말로 대단하다.

  거대한 하얀색은 두려웠지만 언젠가는 해치워야 했고, 나는 떠는 손으로 붓을 들고 색칠을 서서히 해나갔다. 처음에는 너무 긴장해서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렸다. 그래도 “빈 캔버스보다는 채워진 게 낫다”라고 끊임없이 되뇌며 나를 다잡았다. 이런 조심스러운 실행력을 지니고 붓을 움직이니 어느새 “망해봤자 과제인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변모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내 그림을 선보여야 했고,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자신감으로 뻔뻔해진 뇌는 나를 점점 더 다그쳤다. '빨리 어떻게든 그려라. 비전공자로서 완성조차 못한다면 변명할 말도 없다'라는 생각이 곧 내 몸을 꽉 채웠다. 그 순간 내 앞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뻔뻔한 절박함으로 가득 찬 나는 거침없이 거대한 하얀 직육면체를 여러 색깔로 지워나갔다. 삼십 분 넘게 고민했을 문제도 그때는 채 일 이분도 걸리지 않았다. 혼자 인터넷을 찾아 해결하거나 다른 방법을 고심할만한 상황에도 같은 수업을 듣는 함께 작업하던 전공자들에게 거침없이 물어봤다. "이렇게 그리고 싶은 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원래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질문도 거침없이 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때 같이 밤을 새웠던 분들이 큰 도움을 주셨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물감과 붓도 빌려주셨다. 내 마음에 비해 너무나도 큰 마음을 받아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스러웠다.

  붓을 뻔뻔하게 계속 휘졌다 보니 벌써 시간은 오전 네 시를 훌쩍 넘겨 다섯 시를 향해 내달렸고, 내 앞의 거대한 하얀색은 어느새 여러 색깔로 뒤덮여 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단연컨데 그때의 성취감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다. 내 그림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내가 스스로 이 작업을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그 순간, 내 그림이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한 과정과 완성할 때 느낀 행복한 성취감이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밖에 나가 아침을 먹으려고 미디어관 건물을 나설 때, 문득 미대생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났다. 그들에게는 내가 오늘 겪은 이 지난한 과정이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다. 나는 수업 단 하나만으로 헉헉거리지만, 미대 전공자들은 이런 창작 수업을 네 개, 다섯 개, 많으면 여섯 개를 듣는다. 이 과정을 헤쳐나간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단순히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수업이 아닌, 뇌 속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조합해서 창작하는 수업을 다섯 개, 여섯 개를 듣는 압박감은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단순한 습득이 아닌 무언가를 창작하는 건 습득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요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오늘도 이젤 위에 얄밉게 사뿐히 놓인 거대한 하얀 물체를 채워나가는 모든 미대생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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