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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Jan 04. 2019

아현동 한 소년의 이야기 -2

067. 아현동 두 번째 이야기.

  아현동의 판자촌에 어린 소년과 할아버지 단 둘이 사는 집이 있었다. 정부 보조금에 의존해서 사는 이 가정은 형편이 좋지 않았고, 당연히도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공립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저소득층 공립유치원 복지제도는 당연히도 없었다. 소년은 유치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주변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유치원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유치원을 다니지 못한 아쉬움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오히려 더 커졌다. 같은 반 친구들이 대부분 이미 같은 유치원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소년을 빼고 서로 다 아는 사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친해졌지만, 소년은 친구와 자기 사이를 가로막는 미묘한 벽이 있다고 느꼈다. 방과 후 학원, 영어 대화, 알 수 없는 공부 이야기를 통해 소년과 친구들 사이 벽은 더욱 두껍고 높아졌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자 소년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새로운 교외활동이 생겼다. 그건 바로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시장을 한 바뀌 도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별 다른 설명 없이 그냥 학교 시장을 한 바뀌 도는 활동이라고 말할 뿐, 왜 새로운 활동이 생겼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설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너무나 기뻤다. 자기만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고통의 영어 시간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속에서 누구보다 빨리 운동화를 신고 준비를 마쳤던 소년에게 선생님은 뜻밖의 부탁을 전했다. 피켓을 들고 제일 앞에서 걸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영어 수업을 빼먹는다는 희열로 가득 차있는 소년은 어떤 말이 적혀있는 피켓 인지도 보지 않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켓에는 '포장마차 철수해주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도 모른 채로 피켓을 들고 신나게 소년은 제일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학교 옆 시장은 면적은 꽤 넓었지만 밀집된 좁은 가게들에 기둥을 설치해서 천막을 친 구조였기 때문에 가게를 지나는 통로에 두 명만 지나가도 시장이 꽉 찼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시장이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소년에게 익숙했다. 소년은 신나게 시장을 휘저으면서 할아버지와 자주 다녔던 가게 아저씨들에게 신나게 인사를 건넸다. 가게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어느 때와 다르게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아저씨 아주머니는 왠지 모르게 평소처럼 소년에게 말을 더 하지 않고 선생님과 더 많은 말을 나눴다. 왠지 모르게 서운했지만 소년은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다음번에 할아버지와 함께 오면 실컷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명만 같이 지나가도 좁은 시장길을 지나 포장마차가 즐비한 탁 트인 거리에 도달했을 때, 소년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고 있었다. 어느 때처럼 아주 크고 밝은 목소리로 소년이 '할아버지'라고 외치자, 할아버지는 어느 때처럼 소년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손자에 대한 반가움이 가득 찬 포옹이었지만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학교 마치고 조심히 집에 오라는 다정한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는 힘 없이 우동을 먹던 자리로 돌아갔다. 항상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고 양도 많이 주던 포장마차 우동 집 아저씨도 선생님과 우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도대체 왜 다들 웃고 있지 않은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장에서 만난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포장마차 우동집 아저씨의 우울한 표정은 소년이 처음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소년을 반기는 건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어두운 표정의 할아버지였다. 허공을 응시하며 허탈한 한숨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항상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한 채 소년에게 먼저 학교 생활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년은 왠지 모르게 위축되어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소년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한숨을 쉬었다. 소년이 할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대고 '할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재차 말한 뒤에야 할아버지는 소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그날의 미소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그날의 미소는 평소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소년을 응시하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소년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혹시 할아버지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니?' 소년은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탁'이라는 단어는 여태까지 할아버지에게 처음 듣는 단어였다. 이러한 단어를 쓰지 않아도 불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함께 저녁을 차려 먹을 때도, 집안 청소를 할 때도 서로 부탁할 것 없어도 생각이 통했다. 할아버지가 요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소년이 밥상을 차렸고, 할아버지가 빗자루로 집안을 쓸면, 소년이 창틀의 먼지를 털었다. 서로 부탁할 필요가 없는 사이에서 '부탁'이라는 말을 들은 소년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것조차 할아버지의 부탁이라면 상관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우울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소년은 최대한 즐겁게 '그럼! 난 할아버지 부탁은 다 들어줄 거야!'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부탁은 소년에게 뜻밖이었다.

  '앞으로는 학교에서 포장마차 가는 걸 하지 않을 수 있니?' 할아버지는 진지하게 말했다. 소년은 그 부탁이 너무 싫었다. 모든 친구들이 다 나가는 데다가 만약 나가지 않으면 제일 싫어하는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어 수업 듣는 거보다 포장마차 가는 게 더 재밌는데...'라고 소년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웃으면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웃음은 예전부터 소년이 계속 봤던 바로 그 미소였다. 소년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소년은 할아버지가 한 첫 번째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안 나갈게!'라고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꼭 듣고 싶었다. '우리 손자 효자네'라는 말을 끝으로 학교 활동에 대한 대화는 끝났다. 어느 때처럼 서로를 배려하며 저녁을 차리고, 집안 청소를 하고 서로 손을 꼭 잡고 잠을 잤다. 그날, 할아버지는 소년과 달리 한 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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