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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Sep 08. 2019

069. 큰 분노와 작은 슬픔

조국, 장제원 그리고 NO:EL(노엘)

  조국의 딸은 현재 비합리적인 특혜 의혹으로 뭇매를 맞고 있다. 장제원 의원의 아들이자 유명한 힙합 아티스트 NO:EL(노엘)은 음주운전과 회유 의혹으로 여론의 싸늘한 질타를 받는 중이다. 두 의혹 모두 질타를 받을 만한 중한 문제이자 한 가지 중대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특혜' 다. 조국의 딸은 아버지 조국의 사회적 지위로 인한 학업상의 특혜를 몰아 받았다. SCI급 논문에 제1 저자로 등록된 점과 여타 인턴십 조작 의혹이 언론을 통해 제시된다는 점에서 '특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지대하다는 건 명백하다. NO:EL의 교통사고 건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이용해 은폐하려고 했다는 세간의 의혹은 얼마나 국민이 사회적 지위에 의한 특혜에 민감한지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바로 평등이다.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법적 절차가 적용된다는 법치주의 이념이 바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법치주의적 평등이라는 필수적 조건이 민주주의에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존엄, 권리, 인격, 가치의 추구 등에 있어 차별이 없이 같은 상태로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분제가 공고한 봉건제 사회와 달리 모두가 동등한 차원에서 동일한 권리를 행사한다. 민주주의의 수혜다. 반면 자본주의는 결코 평등을 달성할 수 없는 체제다.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이자 가장 큰 수확이 평등이라면, 자본주의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평등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체제라지만 결코 기회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평등할 수 없다.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기회'는 부에 비례한다. 단적으로 돈이 별로 없으면 강남의 좋은 학원에 다닐 수 없다. 다만 민주주의는 때때로 이러한 기회의 불평등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데 이는 공정한 법적 절차라는 법치주의적 평등에서 어긋났을 때에 한정한다.

  사회적 기회의 평등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허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정도에 따라 조국의 딸의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부가 달라진다. 다만 민주주의는 때때로 이러한 기회의 불평등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데 이는 공정한 법적 절차라는 법치주의적 평등에서 어긋났을 때로 한정한다. 조국의 딸의 경우가 이 선을 넘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를 것이다. 조국의 딸이 편법과 불법 속 외줄 타기 하는 특혜 속에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이를 대변한다. 반면 노엘은 완벽하게 의심의 여지없는 불법을 저질렀고, 돈과 협박으로 피해자를 매수하려고 한 정황이 사실이라면 더 중한 범죄이다. 하지만 그의 집이 굉장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건 사실이지만 노엘이 힙합 신에서 얼마나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탑 티어의 자리를 올라왔는 지를 본다면 그의 3억 이상의 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행적이 단순히 아버지의 덕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단순히 언론에서 관습적으로 '장제원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것과는 반대로 힙합신에서 이미 노엘의 인지도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장제원의 인지도에 맞먹는다. 그가 국회 의원인 아버지의 힘을 이용해 정황을 은폐하려는 것은 차치하고 그의 평소 행적 및 소비가 적어도 노엘이 탑티어 힙합 아티스트로서 성장한 지난 2년의 기간 동안에는 별 관련이 없다.

  조국의 딸과 장제원의 아들은 각자 삶의 궤적이 있지만, 냉정하게 그 둘에겐 아버지의 그늘이 어른거린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조금은 슬퍼진다. 그 안에서의 노력으로 판별된다면 사회적으로 결코 노력이라고 평가받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또 다른 아주 작은 서글픔이다. 조국의 딸이 향후 얼마나 훌륭한 의사가 된다고 해도, 장제원의 아들이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더라도, 그 둘은 평생 이 굴레를 안고 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달콤한 특혜만큼 쓰라린 비용이다. 나는 이 둘의 아버지보다 이 둘의 삶이 궁금하다. 앞으로 이 굴레를 어떻게 극복할지, 혹은 어떤 경과로 굴복할지. 개인적으로는 둘 다 굴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 본인의 자식들에게 본인들의 아버지와는 반대로 이 작은 서글픔과 쓰라린 비용을 물려주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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