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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Sep 01. 2020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과 영화 라라랜드

박도영 저 도서『오늘의 집을 찾습니다』서평

  모든 콘텐츠는 그 콘텐츠의 정수를 담았을 때 가장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림, 사진,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속에서 피어오르는 일렁거림과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회상 시퀀스를 볼 때의 전율은 분명히 다르다. 책도 예외는 아니다. 단순히 지식 전달을 위해서 교과서를 쓰거나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소설을 집필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 형태일 때 감흥이 가장 큰 경우가 가장 최적화된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좋은 콘텐츠는 많다. 하지만 최적화된 콘텐츠는 드물다. 

  여행 콘텐츠는 가장 경쟁이 치열하다. 일단 너무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영화 같은 영상 매체부터 소설, 에세이 등 활자 매체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콘텐츠의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 즉, 여행기는 한 번 더 비교를 당하는 것이다. 에세이 여행기는 에세이 여행기끼리 붙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다큐멘터리 형태의 여행기와의 싸움도 필수 불가결하다. 게다가 최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짧은 영상과 사진 위주의 플랫폼이 득세하면서 특히나 여행기 에세이는 더욱더 설 곳을 잃었다. 이제 여행기 에세이는 '좋은' 콘텐츠 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좋은' 콘텐츠를 넘어서 '최적화된' 콘텐츠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출판사에서 기획업무를 한 아빠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요즘 누가 여행기 읽냐? 유튜브 봐. 책 팔리지도 않아.

  하지만 단언컨대 책『오늘의 집을 찾습니다』는 좋은 여행기를 넘어 에세이라는 형식이 최적화된 콘텐츠이다. 화려한 편집이 돋보이는 유튜브 영상이 선점하고 있는 여행 콘텐츠에서 『오늘의 집을 찾습니다』는 여전히 활자로 된 에세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실히 보여준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아주 단순한 색의 조화만으로 관람객의 머리를 생각으로 가득 채우는 것처럼, 『오늘의 집을 찾습니다』는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계속 반복해서 보게 한다. 이는 유튜브 여행 영상 콘텐츠가 그간 해내지 못했고, 글이라는 형식에서만 극대화해서 해낼 수 있는 성취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좋은 활자 콘텐츠의 특징은 바로 '실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오묘한 감정'을 명확하게 활자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서 주인공이 쇼코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과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에서 가족 사이의 단절로 비롯된 절망감이 세세하게 묘사된 것처럼, 『오늘의 집을 찾습니다』는 우리가 여행에서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을 아주 정확하게 활자로 표현하는 데 아주 탁월하다. 게다가 히치하이킹과 카우치서핑이라는 저자가 주로 택한 여행 방식의 특성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책 속의 여러 표현은 단순히 여행에서 느낀 감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말 못 한 감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순간 'We love you'를 우린 너를 사랑해로 번역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칫거리는 나를 보며, 우리 언어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들이 쉽게 표현되지 못하고 가라앉아야 하는가 생각한다. pg122
    트렘은 내가 오늘 하루 내내 걸어온 길들을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생각한다. 내가 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루를 걸었구나. pg 161
이 사소하면서도 더없이 커다란 다정함들 덕분에 아무래도 이 길은, 아무렇지 않던 지난날들이 문득 부끄러워지는 길이 되어간다. pg 182

  『오늘의 집을 찾습니다』의 정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현실적인 느슨함'이다. 박도영이라는 사람이 떠난 여행의 자취를 하나씩 밟다 보면 '현실'과 '느슨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나는 이 둘을 어떤 여행 콘텐츠에서도 동시에 느껴보지 못했다. 보통 현실적인 글에서는 느슨함이 결여되고, 느슨한 글은 지나치게 여행의 이상만을 담은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작가의 느슨한 여행 속에서 문득 느끼게 되는 현실의 여러 단면은 독자들의 현실과 오묘하게 얽히고설킨다.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응원하게 되는 계기이자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감동이 몰려오는 이유가 바로 이 것이다. 마치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다 보면 환자와 병에 대한 성찰이 궁극적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것처럼 작가가 자신만의 느슨한 방식의 여행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겪는 고초, 사람들과의 만남, 우연한 기회로 얻은 즐거움 같은 것들이 단순히 그의 여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제 독자가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친구를 만나면서, 우연히 누군가를 소개받으면서 겪는 감정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회상 시퀀스,  마크 로스코의 그림,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와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 그리고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모두 각자의 형식에서 최적화된 콘텐츠다. 나는 『오늘의 집을 찾습니다』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여행기 추천을 부탁한다면 나는 이 책을 가장 먼저 보여줄 것이다. 


오늘의 집을 찾습니다. 박도영 저. 출판사 책과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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