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기묘한 위로, <곡성>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위로와 통찰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by 조현서

<곡성(哭聲)>의 열풍이 뜨겁다. 개봉한 지 이 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450만을 돌파하면서 뜨거운 감자임을 증명했다.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도 영화의 스토리와 결말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결국 누가 나쁜 놈이야? 무명(천우희)은 뭐지? 왜 사람들이 미친 거야? 등 영화의 의문스러운 점에 대해 계속 갑론을박이다. 하지만 <곡성(哭聲)>은 구조상 수 없이 많은 복선과 맥거핀을 영화 내에 심어 놨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게다가 특정 소재를 복선으로 인식하든, 맥거핀으로 인식하든 어느 정도 논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바꿔 말하면 어떤 해석을 하든 어느 정도의 논리적인 결함이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감독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려는 것인데, 나홍진 감독은 범인들의 인간사에 대한 위로를 건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만든 듯 보인다.


곡성2.jpg 인간사에 대한 위로?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의심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의심’이다. 모든 상징과 인용이 ‘의심’이라는 한 가지 개념으로 수렴된다. 우선 영화의 첫 시작은 누가복음 24장 37절을 변형한 글귀이고 끝은 그 구절을 비틀어서 형상화한 장면인데, 이 부분은 부활한 예수가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도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모두 이 성경 구절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수미상관 구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구조를 통해 ‘의심’이라는 핵심 소재를 한 층 강화한다. 또한, 후반부에 무명과 종구(곽도원)가 나누는 대화는 베드로가 예수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부정할 것이라는 요한복음 13장 38절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한 것인데, 이 이야기에서도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구조 역시나 ‘의심’의 굴레라는 점 또한 흥미롭다. 종구가 동료 형사 오성복(손강국)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중반부에는 일광(황정민)에게 의지하다가 굿판 막바지에 딸에 대한 걱정으로 신뢰를 거둔다. 후반부에는 일광을 계속 신뢰하다가 무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광에 대해서 서서히 의심한다. 물론 결말에는 종구가 거의 설득되는 듯 보였지만 무명을 믿지 못하고 대 참사를 마주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흐름 상 종구가 상대방을 대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하지 않고 계속 신뢰를 했던 인물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곡성3.jpg 의심의 굴레 속에서 종구가 신뢰한 인물은 결국 아무도 없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하지만, 의심은 합리성을 대변하는 것

하지만 ‘의심’은 인간의 합리성에 기인하는 특성이라는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해결 방법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인간은 모든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의견을 듣고, 그 의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보다는 의심을 먼저 하는 게 대다수 사람의 성질이다. 게다가 합리적이라고 해도 가장 인간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어떻게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데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베드로가 성경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도 베드로가 예수에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에 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합리성과 본능 두 가지 모두에 반하는, 말하자면 아주 어려운 행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국 종구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과연 우리가, 일반 사람이 종구가 처한 상황에서 종구와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딸 효진(김환희)의 등이 꺾이는 와중에 일광의 굿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무명이 박춘배의 옷을 입은 모습과 딸 효진의 머리핀을 가지고 있는 모습과 순간이동을 하는 초능력을 보고 나서도 무명을 믿을 수 있을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영화 속 종구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합리성을 좇아 행동한 것이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의심했다.


곡성7.jpg 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로서, 과연 굿을 하는 일광을 계속 신뢰할 수 있는가.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의도가 없는 악

영화 속에서 강조되는 또 다른 지점은 바로 ‘악’이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네 딸은 미끼를 그냥 확 물 어분 것이여’라고 일광이 말한 것처럼, 악은 누군가에게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미끼를 뿌려두고 그 미끼를 무는 사람을 공략한다는 것이다. 선행을 한 사람을 벌주는 일차원적인 악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정한 악이다. 누구한테 접근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공포감이 들고 무섭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악’을 활동하게 했던 촉매의 역할이 그 전 대다수의 영화 혹은 다른 작품에서는 ‘인간’에게 있다고 본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그 촉매를 ‘악’ 그 자체에 둔 것이다. 인간의 악행 때문에 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인간은 <곡성>의 세계관에 따르면 단지 이 세상에 존재했기에 악에 의해 참사를 맞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곡성6.jpg 미끼를 콱 물어분 것이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악.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위로와 지옥도, 이 지독한 역설

그렇기에 나홍진 감독은 <곡성(哭聲)>이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영화라고 말한 듯하다. ‘악’은 특정한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미끼를 뿌려둔 것뿐이고, 사람은 본인 스스로의 합리성에 따른 최선의 (인간적인) 선택을 계속해나갔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의 원인은 ‘악’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책임감을 느끼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혹은 본인의 책임으로 일종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악’의 무차별성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는 너의 책임이 아니야’라고 감독이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메시지를 감독은 피해자들을 위한 위로라고 주장한다.


피해자를 나홍진 감독 본인만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동시에 상당히 처절한 지옥도를 보여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이다. 보통 피해자에 대한 위로와 비극적인 결말을 포함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공존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보통 한 인물에 대한 위로는 그 인물이 좋은 결말을 맞는 경우 혹은 부정적인 결말을 맞아도 그 사건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성장 혹은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곡성(哭聲)>은 이 반대의 것을 해낸다. 탈출할 수 없는 지옥도를 그려놓았으면서 그 와중에 피해자에 대한 나름의 위로를 건넨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부분, 종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괜찮아’라고 되뇌는 장면을 보고 있자 하면 복합한 감정이 든다.


곡성4.jpg 처참한 지옥도 속에서 살며시 건네는 위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위로의 본질이란?

하지만, 과연 이러한 방식의 위로가 과연 사람들에게 진실한 위로로 다가갈 수 있을지는 큰 의문이다. 결국 <곡성(哭聲)>이 취하는 태도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무용성이다. 즉, 아무리 인간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 합리적인 행동을 취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결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의견을 지나친 확장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의심’이란 너무나 당연하고 또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게다가 ‘의심’이라 함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당연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의심’이라는 쳇바퀴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종구를 일반적인 인간, 즉 범인으로 충분히 확장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절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결말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위로일까?


나는 사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단순히 ‘너의 책임이 아니다’로 해결된다면 그야말로 참 편한 세상이지 않겠는가. 이 삶이 그렇지 않기에, ‘책임’만으로 지옥도로부터 위로받고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곡성(哭聲)>에서의 지옥도가 현실 세계와 오히려 더 연결되어있고 유의미하다. 나홍진 감독은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영화를 보면 현실 세계이자 우리의 삶을 더 지독히 ‘통찰’ 할 수 있다.


2016.05.30

어쩌다 예매한 열 네 번째 영화 <곡성(哭聲)>

영화 읽어주는 남자 조현서 씀.


p.s) <곡성(哭聲)>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도록 긴 시간 대화를 나눈 고려대학교 중앙영화연구회 돌빛 박종인 선배와 함께 팟캐스트 진행하는 심창민, 배영준, 정종혁 선배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영화 읽어주는 남자 매거진은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업데이트됩니다.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하거나, 다른 접근을 원하신다면 제가 참여하는 <어쩌다 예매한 E열 16번> 영화 리뷰 팟캐스트를 추천합니다.

*팟캐스트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www.podbbang.com/ch/10315


*곧 새로운 매거진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외 '시집 자화상' 매거진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및 댓글은 항상 환영입니다! 피드백 역시나 항상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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