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베테랑, 위로공단, 한여름의 판타지아, 그리고..
작년 한 해 수 많은 한국 영화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 수 많은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어떤 것일지? 제가 뽑은 작품과 독자 여러분 께서 생각하시는 작품을 비교하면서 봐도 재미있을 것 같고, 혹시 작년에 여러 작품을 보지 못하신 분들은 여기에 뽑힌 다섯 영화를 꼭 한 번 봐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5위부터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5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한 줄 평: 대한민국(헬조선)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는 짜임새 있는 "한국" 잔혹동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각 캐릭터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 번쯤은 한국 사회에서 본 적이 있는 캐릭터이다. 세탁소 사장은 안기부를 떠올리고, 군인 할아버지는 어버이연합 같은 시위꾼을 떠오르게 만든다. 집 값 때문에 시위를 벌이고 주민을 협박하는 이야기는 요즘도 재개발이 확정된 지역에서 꽤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영화는 이런 한국 상황을 빌려 왜 수남(이정현 역)이 괴물 같은 일을 벌일 수밖에 없는지를 나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더 나아가 몇몇 장면은 이런 장면을 더 섬뜩하게 느끼게 만든다. 규정(이해영 역)의 손이 잘리는 장면이라던지, 형사(지대한 역)가 수남에게 죽음을 당하는 모습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장면이다. 영화가 결말로 치닫는 걸 보고 있자 하면 영화 내 일련의 사건들이 우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데, 그것이 대한민국의 달동네, 관공서, 은행 등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한국 사회에 대한 씁쓸함은 배가 된다.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하나의 우화에 딱 마지막 온점을 인상 깊게 찍는다. 이 우화에서 선사할 수 있는 결말로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도피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선사하는 씁쓸함이 목 뒤에서 다시 한 번 느껴진다.
4위. <베테랑>
한 줄 평: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이토록 재기 발랄하게 만들어 내는 류승완 감독님의 연출 능력.
재벌과 형사의 이야기. 재벌은 악을 일삼고, 형사는 그것을 파헤친다. 너무나 흔한 소재이다. 그리고 이미 상위 층간의 부정부패는 류승완 감독님이 <부당거래> 때 이미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님은 그의 전작과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또 다른 영화 <베테랑>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우선 <베테랑>은 곁가지가 없다. 범죄 오락 액션 영화라는 정체성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는 곁가지를 치지 않고 범죄 액션 영화라는 정체성 하나로 심플하고 우직하게 치고 나간다. 특히, 사회 비판 영화에서 흔히 범하는 "비판"과 "교훈"의 과잉을 이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즉, 비판에 함몰되어 극 영화로서의 매력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고 영리하게 피해나간다. 시종일관 유쾌한 음향, 짜인 느낌이 아닌 즉흥적인 액션, 미스봉 (장윤주 역)이라는 캐릭터 등을 통해서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 내에 다른 사회 고발 기반 액션 영화와 다른 차별점을 불어넣는다. 황정민과 유아인의 연기도 <베테랑>의 매력을 한 껏 끌어올린다.
3위. <위로공단>
한 줄 평: 극한의 현실 속 비극적인 사건(들)의 모습과 그 비극적인 사건(들)을 담담하게 말하는 강명자 씨의 인터뷰를 환상적인 이미지의 공간 속에 차분하게 담아낸다.
대한민국의 여성노동운동사를 오롯이 담아낸 이 영화는 정말 여성노동운동사의 역사 그 자체라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러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와 완전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여성노동운동을 전달하는 방식이 여타 다른 여성운동 영화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위로 공단>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단순히 인물의 뒷배경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의 공간 자체를 화면에 담아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은 때로는 그 배경에서 여성 노동자분들께서 겪은 비극적인 사건과 대비되기도 하고 때로는 조응하기도 한다. 지극히 비극적인 사건들과 때로 환상적이기까지 한 배경(들)을 보고 있자면 여성 노동자분들께서 겪은 비극적인 시련이 오롯이 느껴져 숙연해질 정도. <위로공단>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사회성과 영화로서의 매력 둘 다 놓치지 않는 영리한 영화이다.
2위.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 줄 평: 한 여름 속 따뜻하고 맑은 공간 속에서 창작에 대한 고뇌의 과정과 그 고뇌의 결과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보통 감독에게 한 가지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 주어질 때, 그 장애물을 성공적으로 돌파하는 것도 대단한 성취지만 그 장애물을 장점으로서 승화시키는 것은 더욱더 대단한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장건재 감독은 바로 더욱더 대단한 업적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고조시"라는 특정한 배경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지만 장건재 감독님은 이 공간을 통해 영화의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이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한 감독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고뇌의 과정을 볼 때는 왠지 모를 위로감과 따뜻함이 느껴지고, 그 과정의 결과물을 마침내 보게 될 때는 탄성을 지를 정도로 감탄하게 된다. "고조시에서 조사를 하는 한 감독"의 이야기와 그 고민에 대한 결과물를 다루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장건재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한 이 작품의 백미는 단연코 고민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는 2부라고 할 수 있다. 장건재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1부)로부터 쌓이는 기대를 결코 배신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를 넘어설 정도로 본인의 결과물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님이다.
1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한 줄 평: 부드러운 이야기와 매력적인 캐릭터 속에서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교훈을 남기다.
정말 매력적인 소재로 가득 찬 영화이다. 홍상수 감독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로맨틱한 이야기 속에 날카로운 시사점을 가진 각본, 각본을 세심하게 잘 드러내 주는 연출, 그리고 그 각본과 연출에 완벽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배우의 연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내 부족한 부분이 거의 없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와 배경 그리고 상황이 동일하다. 이러한 구성 속에서 세심한 대사 변화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와 결말을 이끌어내는데, 이 두 가지 다른 이야기와 결말이 모두 설득력이 있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완전하게 다른 이야기로 이끄는 홍상수 감독을 보고 있으면 경이로움까지 들 정도. 또한 완벽하게 같은 두 배경에서의 이야기이기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세심한 연출을 통해서 영리하게 돌파한다. 연출가로서의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함춘수 역을 맡은 정재영은 영평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탈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 김민희는 어느 한국 영화 여주인공보다 사랑스러워 보인다. 단연코 올해의 한국영화.
이외에도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주목할 만한 영화 (순서 상관없음)
<사도>
<뷰티 인사이드>
<대호>
<무뢰한>
<특종: 량첸살인기>
사실 2015 한국영화 베스트라는 소재는 내가 진행하는 "어쩌다 예매한 E열 16번"에서도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팟캐스트에서는 저를 포함한 네 명의 DJ (정종혁, 조현서, 배영준, 박도영)의 순위를 합산한 결과이기에 이 글에서의 순위와는 다릅니다. 저 보다 더 영화에 능통한 다른 DJ의 의견도 듣고 싶다면 팟빵에서 어쩌다 예매한 E열 16번을 검색해서 한 번 들어 보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예매한 E열 16번 팟캐스트 홈페이지: http://www.podbbang.com/ch/10315)
2016.2.13
2015 최고의 한국영화
영화 읽어주는 남자 조현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