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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Feb 14. 2021

경쟁의 숲을 헤매는 평범한 사회인과 붉은 여왕 효과

 

 부끄러운 흑역사를 고백하자면, 신입사원 시절 나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했었다.

회의시간 쭈뼛쭈뼛 용기 내어 뱉어낸 아이디어가 의외의 호평을 얻으면 '역시 난 천재인 건가' 하며 흠칫 놀랐고, 전략 제안서에 내가 냈던 아이디어가 한 줄이라도 반영되는 날엔 '후훗. 계획 대로군' 하며 스스로의 재능에 감탄해 마지않았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시절 나의 자존감 과잉은 선배들의 배려로 인한 것이었으며 그 정도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안드로이드폰 사용자만큼 많다는 것을.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엔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3년 차 사원 때 만난 K는 주변의 상황을 빠르게 읽고 시의적절하게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차였지만 내가 주어진 업무만으로도 벅차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낼 때,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 주목하여 발 빠르게 이직하였고 지금도 그 업계에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5년 차쯤 함께 일했던 H는 업무능력과 성품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흔히 실력이 좋으면 성격이 까칠하고 성격이 좋으면 업무능력은 별로 일 것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면서도 일처리는 똑 부러지게 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주었다.


최근에 알게 된 P는 명료한 발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구구절절 긴 이야기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겨우겨우 관철시켜 나갈 때 그는 쉬운 한마디로 모두를 설득해낸다.

이러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면 '대단하다. 정말 멋지다' 하고 감탄하기도 하지만, 사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나는 왜 저 사람 같이 하지 못할까?' 하며 낙담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의 강점에 비해 움직임이 둔하고,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챙길 여유가 부족하고, 늘 두서없고 정리가 잘 안 되는 스스로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되며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아무리 발전하려고 노력해도 경쟁상대들 역시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자리에 머물게 되는 현상을 '붉은 여왕 효과'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과 앨리스가 함께 숲 속을 달리는 장면에서 유래하였다.
“저는 계속 뛰는데, 왜 숲을 벗어나지 못하나요? 원래대로라면 벌써 숲을 벗어나 멀리 갔을 텐데.”
“거울 나라에서는 그렇게 달려야 봐야 제자리야. 숲을 벗어나려면 그것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맞이할 수 있는 흔한 상황이다. 나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그래서 월등한 성과를 내는 같은 포지션의 비범한 사람들을 마주한 상황. 나름 열심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때.

사회생활의 붉은 여왕 효과를 벗어나기 위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 끝나지 않을 경쟁에서 벗어나 삶에 충만함을 주는 다른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앞서가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않아도 좋다. 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남들보다 앞서 가지 못한다고 해도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또 다른 선택지는 더 힘을 내어 지금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다. 붉은 여왕의 말처럼 ‘지금보다 두배는 더 빠르게 달려’ 그들과 경쟁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을 받았을 때의 보람은 그 무엇보다 큰 만족을 주기 때문에.


글을 마무리할 때쯤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극적인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을 부러워만 해서는 결코 이 고민의 숲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비범한 그들의 대단한 점을 배우고 미미하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한 나만의 강점을 키워가다 보면 붉은 여왕의 숲에서 벗어나 또 다른 어딘가에 도착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한 예능 PD의 자전적 에세이 제목이 작은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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