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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Feb 21. 2021

로젠탈 효과와 그녀의 사정에 관하여

 

 며칠 전 소설을 읽다가 생선가시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콕 박혀버린 문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재능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 먹어간다¹'라는 문장이었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호기롭게 덤벼들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단 몇 마디로 규정해버린 것 같은 그 문장에 발끈했지만 그 문장을 부정할 또 다른 문장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날카로운 문장은 핀셋으로도 뽑아내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박혀 버렸다.

미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아까운 젊음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3년 후쯤엔 지금의 이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불안정한 감정이 그녀의 새벽을 짚어 삼키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알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위에 눌린 사람을 흔들어 깨워준 것처럼 '까똑!' 하는 소리가 고마웠다.

"후.."

우선 차가운 물부터 마셨다. 곧이어 메세지를 확인한 그녀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함께 글을 쓰고 있는 R선배에게 구상하고 있는 소설의 초기 아이디어를 넌지시 이야기해 보았는데 늘 까칠하기만 했던 선배가 모처럼 칭찬을 건네었던 것이다.
'재밌네. 가만 보면 넌 발상 하나는 좋은 듯'


그냥 예의상 해준 말일 수도 있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고 해야 하나. 그 짧은 피드백 하나가 그녀의 창작욕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줬고 신경 쓰였던 가시를 잊게 해 주었다.


일종의 로젠탈 효과였다. 로젠탈 효과는 칭찬의 긍정적 힘에 대한 심리학 이론 중 하나이다.

한 초등학교에서 몇 명의 학생 명단을 무작위로 뽑은 뒤 교사들에게 지능지수가 높은 학생들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조사해 보았더니 지능지수가 높다고 이야기했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 점수가 높았다고 한다. 교사의 관심과 기대가 격려로 이어졌고 학생들의 성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선배의 소소한 격려가 지금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것처럼.

그녀는 문득 선배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이밍 좋은 칭찬이 고마웠던 것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가끔 둘이 만날 때면 한 살 많다는 이유로 늘 커피값, 술값을 내는 건 선배였던 것이다.


마음은 백화점이었지만 아직 알바비를 받으려면 한참 남았으므로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당근마켓에 들어갔다.

'여기도 잘 찾아보면 괜찮은 게 많거든요..'


졸린 눈을 비벼가며 스크롤을 한 시간쯤 내렸을까. 꽤 귀여운 장식소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사가기 전에 서둘러 판매자에 메세지를 보냈다.


'아침 일찍 죄송해요. 혹시 3만 원에 구매 가능한가요?'

'네. 아직 안 팔렸어요'

'오후에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오후엔 일이 있어서.. 9시쯤 안되실까요?'

'음.. 네 좋아요. 그때 뵐게요'


약속은 3시간 후. 밤을 꼴딱 새운 그녀였지만 가격도 적당했고 놓치고 싶지 않은 물건이었다.

'선배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약속 시간 전까지 글이라도 써볼 생각으로 다시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점점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아 잠들면 안 되는데. 잠들면 안 되는데.. 하다가 결국 잠이 들어버렸다.

"대충 이런 상황이지 않을까?"
"알았어. 알았어. 10분만 더 기다려보자"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당근마켓 구매자를 기다리며 상상해 본 그녀의 사정에 관하여.



<¹ 최은영 소설, 쇼코의 미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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