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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Mar 14. 2021

진격의 며느리가 일으킨 메기효과와 생태계의 진화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내향성'의 인간이다.

표현이 서툴고, 수다를 즐기지 않으며, 웬만해서는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나의 이런 습성은 당연히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파생되었고 그 이야기인즉슨 나와 부모님, 그리고 누나로 구성된 우리 가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내향성 무리들이라는 것이다.


명절이나 생일처럼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굳이 서로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일은 드물다. 전형적인 '무소식이 희소식' 이론의 추종자들이다.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드물다. "그려.. 잘했네" 정도가 최고의 칭찬인 편.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평균 통화시간은 3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에게 가족으로서의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뚝뚝해 보여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섬세한 감정선을 공유한다. 표현에 서툰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여 살다 보니 나름의 방식으로 조용하고 단단한 생태계를 조성해 온 것이다.


잔잔했던 생태계에 황소개구리와 같은 생태교란종이 나타났다. 생태계의 원주민들은 당황했지만 강력한 포식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포식자는 정체는 슈퍼발랄 외향형인 나의 아내이다.


처음 결혼을 약속하고 인사를 하러 온 날. 우리의 가족들은 그녀가 기존 생태계의 구성원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존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자리가 어려울 법도 한데 아내는 조잘조잘 잘도 이야기를 해 나갔다. 만나게 된 계기와 서로의 장단점.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결혼식과 퇴사 후 세계여행 계획까지. 자리가 마무리될 때쯤엔 거의 MC가 되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해가 지면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에겐 쾌활한 술친구가 생겼다. 고향을 방문할 때면 아내는 넉살 좋게 아버지에게 먼저 다가가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한 병 더 꺼내올까요? 푸항항항"

하며 과음을 권하는 며느리.

아버지도 처음엔 당황하신 듯 보였지만 이제는 우리 부부가 집에 오는 날을 기다리고 계신 것 같다.


"어. 그래. 왜?"

늘 용건만 간단히 통화하시던 어머니는 아내와의 수다에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하신다. 때로는 삼십 분 넘게 이어지는 며느리의 이야기에 먼저 항복을 선언하신다.

"저기.. 있잖아.. 곧 드라마 시작할 시간이라서.."


메기효과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작은 물고기 떼가 모여있는 웅덩이에 포식자인 메기를 풀어놓으면 물고기 떼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에서는 시장에 막강한 존재가 등장하여 다른 플레이어들의 경쟁력이 덩달아 높아지는 상황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인다.


주말이면 늘 작은 자취방 밖을 벗어나지 않았던 나를 밝은 바깥세상으로 이끌었던 그녀.

결혼 4년 만에 과거 생태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메기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감정표현에 서툴렀던 사람들이지만 감정표현에 적극적인 아내를 따라 쭈뼛쭈뼛 '고마움'과 '그리움' 같은 감정들을 표현한다.

가족끼리 스킨십은 질색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헤어질 때면 자연스럽게 아내의 포옹을 받아들인다.


현실 속 생태교란종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을 결국 잡아먹었겠지만 우리 가족의 귀여운 생태교란종은 지금도 생태계를 더욱 풍요롭게 바꿔가며 평화롭게 공존 중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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