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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Jan 31. 2021

앵커링 효과와 그 시절의 관람문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영화를 관람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박수를 치고 상영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길. 스마트폰을 꺼내 자주 가는 영화 커뮤니티에 들어가 베스트 댓글을 읽어본다. 미처 몰랐던 영화적 장치와 대사의 의미에 대해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상영관을 나와 영화에 대해 스스로 사유한 시간은 고작 몇 초. 감독이 전하고자 한 영화의 메시지를 충실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남의 생각을 빌려온 것뿐이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생각과 대화는 베스트 댓글에 남겨져 있는 평점과 해설의 근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베스트 댓글의 '앵커링 효과'이다.


앵커링 효과는 닻(Anchor)을 내린 배가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기 전 보게 된 숫자나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인생영화로 '다이하드' 시리즈를 꼽았을 정도로 (물론 지금도 유효하지만)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편식했던 나는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아내를 만나 취향이 확장되었고 영화에 대해 대화 나누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영화관을 나선 후 골목골목을 빙빙 돌며 그녀의 집 앞까지 걸어가는 길은 함께 본 영화에 대한 해석과 추리로 촘촘하게 채워졌다.


요즘의 대화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정보를 보고 "아, 주인공 마지막 대사가 이런 의미였구나.", "초반에 그 장면이 복선이었네." 정도가 고작이다.


정보가 너무나도 풍족한 시대. 과거의 디스토피아적 우화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보를 쏟아부어 바다를 만들어 버린 듯하다. 손만 뻗으면 두 손 가득 지혜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무엇이 유효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사이 스스로 항해하는 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오늘은 집에 갈 때까지 인터넷 찾아보지 말아 볼까?"

또 다른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내에게 제안해 보았다.

영화에 대한 만족도도 해석도 제각각. 오래 정박해 두었던 배를 띄운 것처럼 조금 삐걱 거리지만 이내 바람을 탄 듯 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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