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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Mar 08. 2021

고르디아스의 매듭과 산책의 쓸모

 회사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사고, 누군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근 미래에 대한 걱정.

어쩌면 우리의 하루는 일정한 빈도로 생성되는 고민과 그 고민의 해결, 혹은 포기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나의 고민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고민이 특급배송으로 찾아온다. 생각을 집중하여 빠르게 고민을 해결하고 싶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온전히 생각을 집중한다는 것은 꽤나 사치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인류에게는 산책이라는 무기가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살아남은 행위라는 것은 분명 남다른 쓸모가 있다는 뜻일 게다.

돌이켜보면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는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던 문제가 산책의 길 위에서 수월하게 정리되었던 경험이 꽤 많다.

아마도 산책이라는 행위는 이동이라는 단순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으로 향하는 손과 눈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전방의 위험을 대응하는 정도의 최소 판단 능력만 남겨둔 채, 나머지 사고 영역을 고민 해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효율적 시스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하게도 직장과 집을 이어주는 길은 '경의선 숲길'이라는 훌륭한 산책로이다. 버려진 철길을 공원 형태로 조성한 길로 길을 따라 심어진 나무와 꽃들, 그리고 츄르를 배불리 먹고(?) 통통해진 고양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집까지 약 한 시간 반. 하루 한 가지 고민에 대해 생각해보기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알맞은 시간이다.


야근을 하지 않는 저녁은 늘 이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가장 오래 묵혀두었던 고민 보따리를 슬쩍 풀어본다.

사무실에서는 고민할수록 더 꼬여만 갔던 '고르디아스의 매듭'과 같은 문제가 산책로 위에선 슬쩍 느슨해지는 기분이 든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풀기 힘든 문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고르디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왕이다. 그는 자신의 전차를 복잡한 매듭으로 묶어 놓고 이 매듭을 풀어낸다면 그 사람이 훗날 아시아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그의 예언에 너도나도 달려들어 매듭 풀기에 도전하였는데 누구도 풀어내지 못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도 매듭 풀기에 도전했는데 처음엔 실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생각을 바꿔 매듭을 일일이 푸는 것이 아니라 칼로 잘라버렸는데 훗날 고르디아스의 예언처럼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 되었다.


앞으로의 커리어와 이직 문제로 고민이 많은 후배에게 슬쩍 산책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선배답게 냉철한 조언은 못해줄 망정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표정이 스쳤지만 뭐.. 나로서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오늘도 나와 같이 매일매일 생성되는 새로운 고민을 껴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도 높은 생각의 시간이 잘 이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걸을 수 있는 자기만의 산책로를 개발해 보기를 권한다.

같은 자리에 앉아 익숙한 생각의 길로 고민을 몰고 가는 것보다는 탁 트인 산책로를 걸으며 천천히 생각을 이어가 보자. 그러다 보면 매듭을 잘라버리는 것처럼 쉽고 명쾌한 답이 산책로의 고양이처럼 슬쩍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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