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스톤 브루잉과 빨간 맛의 추억

by 이백구십칠

그러나 푸아를 맞이한 나의 내장은 괜찮아, 잘했어, 하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아름다운 요리는, 언제나 상냥하다.


-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무라카미 류, 작가정신.2012>




나는 절대 외국에서 살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유럽여행의 열흘 차쯤이었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면서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하며 이름난 맛집들을 찾아다녔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사무치게 그리워진 것은 한국의 빨간 맛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삼겹살 위에다가 김치 지글지글 구워 먹을 거야. 아니다. 일단 김밥천국 제육덮밥 먼저 먹어야겠어"

"오빠야는 맨날 제육이가?"

"내 페이보릿 푸드다"


실없는 망상이 쌓여갈수록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고 '역시 나는 음식 때문에라도 외국에서 오래 살지는 못하겠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유럽에도 한식당은 존재한다.

특히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식당에서 먹었던 김치찌개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식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지쳐갈 때쯤 만난 그 김치찌개는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의 제대로 된 김치찌개에는 한참 못 미치는 어설픈 찌개였다. 하지만 느끼한 스테이크와 파스타에 지친 나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맛이었다. 게다가 한국 대기업의 현지 지사 사람들로 추정되는 손님들의 친근한 한국어 대화가 BGM으로 깔려서 마치 한국의 평범한 백반집에서 식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너무 허겁지겁 먹느라 입천장이 다 데었던 기억이 난다.


베를린의 한식당도 기억에 남는다. 외국에 있는 대개의 한식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 현지화가 되어있기 마련이다. 조리법을 변형하거나 일부 재료를 대체하여 현지인들도 포용할 수 있는 맛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의 어두운 골목에서 만난 그 식당은 메뉴의 구성, 음식의 맛, 분위기 할 것 없이 한국의 허름한 삼겹살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현지인이나 여행객을 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다수의 한국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식당이었기에 가능한 일로 추정이 된다. 그날 밤 한국의 맛과 분위기에 취해 주량을 한참 넘은 참이슬을 마셔댔고 다음 날 오전 일정은 취소해야 했다.


장기 여행 중 운 좋게 이런 한식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타국에서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것과 같은 행운이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도시에서 그런 행운을 만나는 것 또한 욕심일 것이다. 여행지의 상황에 따라서는 한식당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한식당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음식의 이름만을 단 현지 음식인 경우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식당이 아닌 의외의 곳에서 예기치 않게 한국의 맛을 만난다는 것 또한 엄청난 행운일 것이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스톤 브루잉에 방문한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스톤 브루잉의 포스에 압도되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소규모의 브루어리와는 달리 규모부터 어마어마했고 곳곳에 스톤 브루잉의 상징인 악마 캐릭터가 우리를 부담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잔뜩 움츠러든 쭈구리들에게 메뉴판이 쥐어졌다. 먼저 다양한 탭 리스트가 시선을 끌었다. 사흘 연속으로 방문해도 다 맛보지 못할 듯한 긴 리스트에 어떤 맥주부터 맛봐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시선을 내리던 중 익숙한 알파벳을 마주하였다.


"K.. O.. REAN.. BBQ?"

"코리안 비비큐가 왜 여기서 나와?!"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우리가 방문할 것을 예상한 것인지. 머나먼 독일의 브루어리에서 한시적으로 한국 스타일의 안주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국땅에 비싼 돈 주고 여행 와서 한국 음식만 찾다가 갈 것이냐?!'

냉정한 우뇌가 호통쳤지만 우뇌의 지휘권을 무시하고 폭주한 주둥이는 이미 주문을 하고 있었다.

"원 라거, 원 IPA. 앤 코리안 비비큐!"


사실 코리안 비비큐라고 해봐야 두툼한 고기에 고추장 맛이 나는 끈적한 소스를 덮은 맛이었지만 긴 여행에 지친 우리들에게는 이마저도 고마운 맛이었다. 매콤한 비비큐와 씁쓸하고 살짝 단맛이 도는 IPA의 맛 또한 잘 어우러졌다. 리얼 코리안들의 평가가 궁금한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종업원에게 말없이 엄지를 '척' 내보였다.


여행 당시만 하더라도 신세계였던 스톤 브루잉. 요즘에는 한국의 펍이나 마트에서도 종종 스톤 브루잉의 악마 캐릭터와 마주친다. 여전히 무서운 생김새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친근한 느낌이다. 그리고 스톤 브루잉의 맥주를 마주칠 때면 조건반사처럼 그날의 빨간 고추장 소스 맛이 떠오른다. 글을 끄적이는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서 때 이른 저녁 계획을 세우게 된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맥주랑 매운 떡볶이 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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