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가 난처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끝까지 가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늦은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게 미로의 문제점이다.
- 「이상한 도서관」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2014>
날씨가 며칠 째 우중충해서였을까? 평소보다 컨디션이 나빠서였을까?
평소라면 차근차근 내 감정을 설명했겠지만 이 날 만큼은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어느 한쪽이 한 걸음 다가와 주었다면 금세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이 날 만큼은 오래도록 평행선을 이어갔다.
지금의 냉전 상태가 얼마나 이어질까? 하루? 이틀? 아니면 반나절?
'시간이 해결해주겠지'하고 맘 편히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작은 문제가 있었다. 지금 이곳이 처음 와 본 베를린의 뒷골목이고, 나는 심각한 길치라는 것이다.
스스로 길치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것은 내가 길을 기억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보통의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 찾아가는 길을 기억할 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고 100미터 쯤가다가 우체국 끼고 골목으로..'처럼 큰 건물과 방향으로 기억을 한다면, 길치인 나는 '그래. 전에 왔을 때 허름한 건물에서 튀김 냄새가 풍겨 나왔고 분위기가 되게 평화로웠는데..' 하며 그날의 인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게다가 혼자서는 집 밖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고 늘 누군가와 함께 이동하다 보니 상대방의 길 찾기 능력에 염치없이 기대온 세월이 쌓이고 쌓여 나의 길 찾기 능력은 점점 더 퇴화되어갔던 것이다.
아내 역시 퇴화된 나의 길 찾기 능력을 익히 아는지라 우리는 냉랭한 와중에도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해가며 어색하게 베를린 거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어이구. 저 인간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나만 곤란하지'
그녀의 마음속 목소리가 머리 위 말풍선으로 영사되었다.
쭈뼛쭈뼛 그녀의 뒤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펍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라거 한잔을 주문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흥. 나는 똑같은 거 주문하지 말아야지!'
상대방은 신경도 안 쓸 소심한 반항으로 흑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잠시 고민하다 슬그머니 그녀의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날씨도 우중충, 기분도 우중충, 맥주도 우중충한 흙빛이었다. 깜깜한 맥주잔에 못난 얼굴이 비친다. 꿀꺽꿀꺽 들이켜 보았지만 기분 탓인지 텁텁하기만 하다. 역시 맥주 맛은 맥주 자체의 맛과 분위기의 총합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시는 맥주가 맛이 있을 리가 없다. 함께 내어 준 땅콩만 오독오독 축낸다.
이대로 이 맥주를 다 마시고 펍을 나선다면 또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며 숙소까지 걸어야 할 것이다. 곤란하다. 곤란해.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 자고로 화해는 타이밍이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척,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기회를 노린다.
"있잖아. 옛날 독일 사람들은 그날 마시는 마지막 맥주는 꼭 흑맥주로 했었데. 까만 맥주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면서 그날 하루를 반성했다고 하더라고"
".. 진짜? 거짓말이지?"
".. 응. 뻥이야. 미안"
얼렁뚱땅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텁텁했던 흑맥주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