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데이션 분노와 벨기에 라거&감자 튀김

by 이백구십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언제나 함께 온다. 그 중 무엇을 중심으로 내 과거를 이야기로 엮을지는 내 선택이다.

내 이야기에 대한 편집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 「태도의 말들: 사소한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 <엄지혜, 유유.2019>




애석하게도 벨기에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유럽 여행의 첫 번째 도시가 벨기에의 브뤼셸임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와 관련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정보는 고작 '오줌싸개 동상', '케빈 데브라이너' 정도였던 것이다. 브뤼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부랴부랴 여행 가이드북을 뒤적 거렸지만 유명한 맛집에 대한 정보 외에 유의미한 정보를 입력하는 데엔 실패하였다.


하지만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게으른 여행자에게도 브뤼셸은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였다.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한 유명 관광 도시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거리마다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이 모여 역동적인 공기의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상업 시설이 부족한 쿠바 아바나에서 한달 넘게 머물다 넘어온 첫 번째 방문지였기 때문에 매대를 가득 채운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아바나에서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할 것처럼 마트와 레스토랑을 들락거리며 벨기에의 다양한 맥주들을 탐닉하였다.


흥청망청 브뤼셸의 밤거리를 한창 걷고 있었을 때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레스토랑의 호객꾼인 듯한 현지 중년 남성이 갑자기 나의 앞 길을 막고는 '아뵤~!'하며 이소룡 흉내를 낸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특별히 위협적인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를 지나쳐왔다. 그리고 브뤼셸에서 머문 이틀 동안 그 사건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시커먼 강물에서 무언가 두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잊혀졌던 안 좋은 추억이 어느날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불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벨기에를 떠난 며칠 후 문득 브뤼셸에서 그의 행동이 친근함보다는 무례함에 가까웠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멀스멀 분노가 피어올랐다.

'아니. 왜 멀쩡히 길 걷고 있는 사람 앞 길을 막은 거지? 그리고 그 이소룡 흉내는 또 뭐람? 내가 이소룡을 닮았다는 건가? 동양 사람들은 다 쿵푸를 할 줄 알거라는 건가? 혹시 나 인종차별 당한건가? 그런데 바보처럼 아무런 항의도 못한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의 농도는 점점 짙어졌지만 분노를 해결할 타이밍은 한참 지나버렸고 대상이 부재한 분노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한참동안 마음 속을 헤짚어 놓았다.


과거 여행지에 대해 떠오르는 첫 번째 연상이 부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지금도 브뤼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때의 사건보다는 좋았던 기억을 의식적으로 끄집어 내려고 노력한다.

브뤼셸에서의 좋았던 기억이라면 아무래도 맛있는 맥주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주에 감자튀김을 곁들여 먹었던 시간이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현지에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벨기에는 와플 뿐 만 아니라 감자튀김이 맛있기로 유명했고 현지인들도 그들의 감자튀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감자튀김이라면 무조건 맥도날드의 얇고 짭짤한 감자튀김을 선호하고 두꺼운 감자튀김은 퍽퍽하다는 이유로 불호하는 나였지만 벨기에의 두꺼운 감자튀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이 고깔에 듬뿍 담아주는 두툼한 감자튀김을 마요네즈 소스에 푹 찍어 먹으면 바삭한 겉면과 포슬포슬한 안쪽 면의 식감이 조화를 이루었다. 마요네즈 소스 또한 의외의 조합이었다. 한국에서는 감자튀김을 먹을 때면 늘 케찹과 함께 해왔기 때문에 마요네즈 소스가 자칫 느끼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감자의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오히려 더 강화시켜주었다. 거기에 청량한 벨기에 라거 맥주라면 분명 실패 없는 조합이다. 지금도 벨기에의 감자튀김과 라거 맥주를 떠올리면 무례한 호객꾼과의 텁텁한 추억이 말끔히 씻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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