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게으른 하루와 크리스탈 맥주

by 이백구십칠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2013>




2017년 7월. 현지시각 오후 5시 40분.

나는 쿠바 아바나 공항에 놓여져 있었다. 서울 반포동의 사무실에서 야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인천공항으로부터 스무 시간을 날아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 도착한 것이다.

'어이쿠. 이제 되돌리기엔 늦어 버렸어'

지독한 숙취와 함께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오랫동안 꿈꿔왔던 '퇴사 후 장기여행'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쿠바에서 약 한 달, 이후 유럽에 약 한 달 반 가량 머무는 여행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온갖 모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던 한 달간의 쿠바살이는 사실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쿠바라는 새로운 환경에 흥분하여 전력질주로 아바나를 체험하고자 애썼지만 하루하루가 반복될수록 이곳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구분되고 가장 효율적으로 24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목차가 완성되어 갔다. 처음의 환상은 사라지고 그저 단순하고 게으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아침 7시나 8시가 되면 늘 눈이 떠졌다. 나는 아침잠이 참 많아 언제나 혼나며 깨는 타입의 인간이었는데 이곳에서 만큼은 신기하게도 눈이 일찍 떠졌다. 썬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 썬글라스를 장착한 후 거리로 나선다.

우리의 숙소는 센트럴 아바나의 한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맞은편에 쿠바에서 꽤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 <딸기와 초콜릿>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이었다.

"쿠바 최고의 레스토랑을 찾고 있니?"라며 지나치게 으스대는 가드를 지나쳐 작은 동네 마켓에 들른다. 편의상 '모퉁이 마트'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곳에서 늘 쿠바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아침으로 먹었다. 10cup(당시 약 700원)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관광지와 상업시설이 몰려있는 올드 아바나 지역으로 향한다.


올드 아바나에선 그때그때 마음 닿는 데로 걸어 다닌다. 미술관에 가기도 하고 공원에 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거기 무슨 일 있어요?'하고 가보면 누군가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또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제서야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한다. 레스토랑이라고는 하지만 입맛에 맞는 곳을 찾기는 어렵다. 지나치게 짜거나 지나치게 싱거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후 2~3시쯤이 되면 대부분의 경우 숙소로 다시 돌아온다. 지칠 대로 지친 대다 땀에 절어 샤워 생각이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걸어서 돌아오는 날이 많지만 가끔은 Bici taxi(인력거)를 타고 들어오기도 한다.

숙소로 돌아오면 언제나 주인 할아버지의 까칠한 반려견이 왈왈 거리며 우리를 맞이 해준다. 주인 할아버지는 테라스에 앉아 신문 같은 것을 읽고 계시다가 우리가 들어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알 수 없는 스페니쉬로 한참 얘기하시고는 엄치를 척 내보이신다. 대부분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나도 엄지를 척 내보이고 방으로 들어온다. 어쨌든 뭔가 일이 잘 풀리셨다는 얘기이실 것이다.

방에 들어오면 샤워를 하고 한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잠이 오지 않으면 여행기를 끄적거리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한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거리로 향한다. 이 시간에는 온도가 조금 낮아져 이동하기 훨씬 편하다. 다시 이런저런 곳을 기웃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바를 발견하면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다이끼리나 쿠바 리브레를 주문하고는 책을 읽거나 아내와 수다를 떤다.

저녁식사로 가장 많이 먹은 것은 랑고스타(랍스터)인 것 같다. 어느 레스토랑에 가든 랑고스타를 파는 곳이 많았고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큼직한 랑고스타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랑고스타라는 단어가 보이면 일단 주문을 했다. "씬쌀, 뽀꼬쌀" (소금은 빼주세요, 소금 조금만 넣어주세요) 하고 주문을 하면 쌀밥에 아보카도나 데친 야채를 곁들이고 큼지막한 랍스터를 구워 낸 요리를 내어준다. 별다른 소스나 조리법 없이 그저 구워 낸 것일 뿐이지만 쿠바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선 말레콘 방파제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감상한다. 일종의 종교적 의식처럼 항상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였다. 길게 늘어선 방파제를 걷다가 적당히 깨끗한 자리를 골라 앉는다. 맥주나 팩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듣다 보면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삼십 분 정도에 걸쳐 해가 서서히 고개를 젖힌다. 그에 따라 하늘은 황금색에서 보라색으로 다시 붉은색이나 푸른색으로 너울거린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슬슬 자리를 정리한다. 쿠바의 밤거리가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되도록 너무 늦지 않도록 자체적 통금시간을 정해 두었다. 구멍가게에 들러 생수와 맥주, 가끔은 아바나 클럽(럼주)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좌판 가게에서 사 온 망고를 손질해 함께 홀짝홀짝 술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다시 잠에 빠져든다.


이것이 우리가 아바나에서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일어나 아침을 먹고 걷는다. 걷다가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낮잠을 자고 다시 걷는다. 바에 들어가 술을 홀짝인다. 그리고 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때그때 조금씩 무언가 더해지거나 빠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목차는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나태한 날들이 한 달 동안 이어졌다.


아바나에서는 맥주 선택의 폭 역시 단순했다. 대부분의 음식점이나 가게에서 맥주를 주문하면 당연한 듯 크리스탈 맥주를 내놓거나 흑맥주 계열인 부까네로 정도의 옵션이 있을 뿐이었다. 하이네켄 같은 익숙한 맥주를 마시고자 한다면 호텔 바 정도는 찾아가야 했지만 우리는 가난한 여행자이었으므로 일반적인 라거 계열의 맥주인 크리스탈 맥주만 주구장창 마시게 되었다.

빵 사이에 치즈와 햄을 끼운 것이 레시피의 전부인 딱딱한 쿠바 샌드위치를 덥석 베어 물고 더운 날씨 탓에 금방 미지근해진 크리스탈 맥주를 목으로 넘기면 특별한 맛이나 청량감이 있다기보다는 '아. 내가 맥주를 마시고 있구나'하는 자각만이 생성될 뿐이었다.


그렇게 크리스탈 맥주와 함께한 한 달간의 쿠바살이를 마무리하고 유럽으로 넘어 간 우리는 그동안 못 마신 맥주를 보상이라도 받을 기세로 곳곳의 유명 브루어리를 찾아다녔다.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쿠바의 크리스탈 맥주는 유럽의 브루어리에서 마신 맥주들에 비해 한참 모자란 맛이었겠지만 말레콘 방파제에서 매일 홀짝 거렸던 크리스탈 맥주의 추억만은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단순한 일상도 한정된 맥주 선택의 폭도 그 순간에만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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