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맛 평양냉면과 필스너 거품맥주

by 이백구십칠


30대는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다.


- <John Lennon>




처음 '어른의 맛'을 맛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마포의 한 광고회사에서 인턴쉽을 하던 겨울방학이었다. 당시 현업 선배님들은 병아리 같은 대학생들이 험한 광고일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모습이 가여웠는지 점심시간만 되면 나와 같은 인턴 무리들을 데리고 이런저런 맛집에 데려가 주셨다. 대학가의 가성비 중심 백반집이나 학식에 익숙했던 우리들에게 선배들이 사주는 음식들은 신세계의 맛이었다. 아무래도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근처 회사원들을 주 고객으로 한 식당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단가가 높은 음식들이기도 했고, 선배님들 또한 어린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일부러 더 좋은 음식, 신기한 음식을 먹여주려 노력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얻어먹었던 많은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하나만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 평양냉면이다.


인턴생활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 선배가 '어른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앞장서 우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선배의 뒤를 졸졸 따라가 도착한 곳은 그 유명한 '을밀대'였다. 다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된 건물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 한번 놀랐고, 단출한 메뉴판과 단출하지 못한 가격에 두 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주문한 평양냉면과 만두가 나왔다. 그리고 '냉면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하며 한 젓가락 맛본 나는 여느 평양냉면 초심자가 그러하듯 '뭐야. 이 손 씻은 물 맛은?'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선배는 "자. 천천히 메밀의 맛을 느껴봐"라며 짐짓 여유를 부렸다.

'역시 어른들의 입맛은 다른 것인가' 경탄하며 열심히 메밀 맛이라는 것을 느껴 보려 하였지만 새파란 대학생이었던 당시에는 도무지 이 비싼 돈을 주고 왜 평양냉면을 사 먹는 것인지 답을 찾지 못했었다. 그것이 내 인생 첫 번째 '어른의 맛'이었다.


두 번째 어른의 맛을 맛본 것은 연애시절 아내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필스너 우르켈 팝업스토어'에서였다. 당시 필스너가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강남역, 이태원 등 주요 밀집 지역에 팝업스토어를 열었었는데 '새로운 이벤트는 무조건 경험하고 보자' 주의인 아내는 발 빠르게 정보를 입수해 강남역 팝업스토어에 나를 함께 데려가 준 것이다.

팝업 스토어로 향하는 길에 아내가 이야기했다.


"오빠. 필스너에 거품만 있는 맥주가 있단다"


맥주는 자고로 청량감 때문에 마시는 존재이고 거품은 그냥 살짝 덮여만 있는 존재인데 거품 맥주라는 게 있다고?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해 웃어넘겼는데, 실제로 가보니 정말 테이블마다 하얀 거품만 가득 찬 잔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생맥주를 주문하고 나면 거품이 얼마나 많게 따르시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거품이 많다 싶으면 '꾹꾹 눌러 담아주세요'라고 요청하는 나였기에 필스터의 거품맥주는 나름 충격적이었다.

'아! 이것이 (체코) 어른들의 맥주구나' 경탄하며 같은 맥주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거품맥주(MLIKO)를 받아 한 입 들이켜 본 첫맛은 꽤 실망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심심한 거품 맛과 아쉬운 청량감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경 써서 데려와 준 아내를 위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역시 맥주는 목젖을 때리는 타격감이 있어야지!' 정도로만 생각했던 좁은 맥주 경험이 문제였을 것이다.


얼마 전 연남동 골목을 휘휘 산책하다가 필스너 전문점을 발견하고 추억에 젖어 들어가보게 되었다. 처음 거품맥주를 맛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고, 유럽 여행을 하면서 전 세계의 수많은 맥주를 경험했던 차였기에 다시 맛보는 거품맥주의 맛은 어떨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다시 한번 필스너 거품맥주와 수제 소시지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5년여 만에 다시 맛본 거품맥주의 맛은 꽤 부드러웠고, 예상 밖으로 청량했다. 거품이라기보다는 잘 정제된 크림을 차갑게 식혀 마시는 것과 같은 부드러움이었다. 함께 곁들인 소시지와의 궁합도 잘 맞아서 다른 탭 리스트들을 볼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연이어 거품맥주만 연이어 주문하게 되었다.


어른의 맛이란 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종종 받아들이기 어려운 맛이나 소수의 매니아들이 즐기는 맛을 어른의 맛이라고 칭하곤 한다. 평양냉면과 거품맥주의 추억을 떠올리자니 나에게 어른의 맛은 '자극적인 맛들을 두루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심심한 맛의 진가'인 것 같다. 앞으로 또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어떤 어른의 맛을 새롭게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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