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에 따라 생각하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문학동네.2019>
2017년 영국 여행은 내 인생의 여행들 중 가장 다이나믹한 여행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전에 방문했던 많은 유럽의 국가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지만, 영국의 물가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였기 때문이다. 비싼 체류비를 들이는 만큼 최대한 많은 곳에 발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이 인기 트로트 가수의 성수기 시즌에 버금가는 빽빽한 스케줄로 이어졌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작고도 비싼 런던의 숙소에서 제공하는 빵과 주스로 아침을 때우고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더 이상 걷기 힘들 때쯤 잠시 쉬고, 다시 걷는 것을 반복하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강행군이었다.
물론 단지 비싼 물가만이 바쁜 스케줄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문화 강국답게 미술관, 박물관과 다양한 핫 플레이스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므로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고 즐기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영국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펍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아기자기한 펍이나 브루어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고 마켓의 매대에는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녁이 되면 늘 '오늘은 또 어떤 펍에 가볼까?', '이따가 어떤 맥주를 사들고 숙소에 들어갈까?'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곳의 수많은 맥주들을 보면서 특히 부러웠던 것은 영국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들이었다. 런던 프라이드, 뉴캐슬 브라운 에일 등 그 지역의 이름을 따오거나 지역 대표 양조장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맥주들이 종종 보였는데, 거대 맥주 브랜드 두세개가 장악하고 있었던 당시 한국 맥주 시장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저런 지역 대표 맥주나 브루어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북가좌 IPA나 봉천 스타우트, 쌍북리 레드에일..뭐 이런 것' 하고 부러움에서 파생된 망상을 했더랬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맥주 문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제 맥주집의 호황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에 생겨난 브루어리들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편의점 냉장고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발랄한 이름의 맥주들이 빼곡히 자리하였으며 각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 전문점들도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 것이다.
강릉의 버드나무 브루어리가 대표적이다.
강릉 홍제동 도로변에 위치한 버드나무 브루어리 안은 인기 있는 관광 스팟답게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입구엔 다양한 독립 서적들도 판매되고 있어 책맥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리를 잡고 탭 리스트들을 훑어보면 미노리 세션, 하슬라 IPA 등 강릉 지역 색채를 띤 맥주 이름들이 재미있다. 미노리 세션은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마을에서 생산된 쌀로 만들었다는 데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슬라 IPA의 '하슬라' 역시 강릉의 옛 지역명이자 '큰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첫 방문 때 이미 리스트에 적혀진 거의 모든 맥주들을 마셔보았지만 다시 방문할 때마다 늘 새롭다. 각각 맥주들의 특색이 강할 뿐 아니라 방문 때마다 늘 그 시즌에 맞춘 스페셜 맥주들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맥주뿐 아니라 음식에도 신경을 많이 썼는지 피자와 직접 만든 햄을 곁들인 치즈 플래터도 상당한 수준이다.
여러 번 강릉에 여행을 가도 늘 이곳을 방문 리스트 최상단에 추가하게 된다. 강릉에 머무는 일정 중 반나절 정도는 뚝 떼어 맥주를 홀짝거리며 책을 읽거나 아내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히)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언젠가부터 여행을 떠나고자 ‘강릉 여행’을 검색을 해보면 '강릉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되었다.
지역을 대표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장소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거나 자연이 선물한 무엇인 경우가 많았다. 과거의 유적지나 과거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미술관, 자연이 만들어 낸 빼어난 경관, 오르고 싶은 산과 같은 것들. 이러한 것들은 아름답지만 한정적이기에 몇 번 방문하고 나면 한동안 그 지역에 발길이 뜸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행히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역을 대표하고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면적의 우리나라 곳곳을 오랜 기간 여행해도 또다시 여행을 떠날 이유가 생기는 동력이다. 나와 같은 맥주 덕후들에게는 버드나무 브루어리와 같은 지역 대표 맥주가 그런 동력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한민국 곳곳에 재기발랄한 지역 맥주와 브루어리들이 더 많이 생겨나 또다시 발걸음을 옮길 이유를 만들어주기를 맥주 덕후 1인은 늘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