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랜치 브루잉과 엄마의 취향에 관하여

by 이백구십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를 통해 정체성 결핍을 은폐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 행복한 사람은 돈으로 경험을 사서 삶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 「굿 라이프」 <최인철, 21세기북스.2018>




자기만의 취향이 확고한 사람은 멋져 보인다.

취향이 확고하다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거쳐왔다는 뜻이고 여러 번의 실패와 영점조준 끝에 자신에게 가장 충만한 행복을 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발견해 내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을 알고 온전히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나에게는 멋진 어른의 전형과도 같았다.


대학생 시절의 선배 P는 처음으로 와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부대찌개에 소주 한 잔이면 호화스러웠던 대학생이었던 나에게 능숙하게 코르크마개를 따고 와인잔에 따라 조금씩 음미하는 그의 모습은 스크린 너머 다른 세계의 연기를 보는 것처럼 이질적이었지만 동시에 멋져 보였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조금씩 와인을 즐기게 된 지금도 P선배의 모습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사회 초년생 시절 A팀장님의 음악 취향 역시 기억에 남는다.

광고주를 방문하기 위해 A팀장님의 차를 얻어 타고 이동하던 중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오디오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조용히 흘러나온 클래식 음악은 '차에서 듣는 음악은 역시 댄스 뮤직이지!'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는 적잖은 놀라움이었다.

"그냥..이런 음악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라며 멋쩍게 웃는 A팀장님은 모습은 지금도 남다른 음악 취향을 가진 멋진 어른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연애시절 아내의 영화 취향도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아내는 독립영화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영화제에 찾아다녔고 GV를 즐겼으며 주말이면 독립영화를 틀어주는 작은 영화관에서 데이트하는 것을 좋아했다. 건물과 도로를 폭파시키며 우당탕탕 악당을 처단하는 헐리우드 액션영화 취향이었던 나는 처음에는 그녀의 영화 취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이끌려 여러 독립영화를 관람한 이후에는 취향이 확장되어 함께 독립영화의 팬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각 분야에 확고한 취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좋은 영향을 받아 나 또한 나만의 취향이라는 것을 가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장르, 그리고 좋아하는 술 같은 것들이 조금은 또렷해지자 어느덧 나도 과거의 그들처럼 나름의 취향을 가진 멋진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 아닐까 자아도취에 빠져들었다.


취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런 나의 생각을 바꿔준 작은 사건이 있었다.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고향에 방문하기로 한 날 아내가 물었다.

"어머님은 뭐 좋아하셔?"

빈손으로 내려가기 어색했던 아내가 무언가 선물이라도 사갈 생각으로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질문에 나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고기를 좋아하시는지 생선을 좋아하시는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지, 선물하면 좋아하실만한 게 무엇인지 그동안 알지 못해왔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만의 취향을 쌓아가는 것만큼 소중한 주변사람들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자기만의 취향이 확고한 사람보다 주변 사람들의 취향을 세심히 살피는 사람이 더 멋진 어른이지 않을까. 이날의 작은 사건 이후 어렴풋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올해 추석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대전에 위치한 수제맥주 공장 '더 랜치 브루잉'에 들렀다.

전국의 브루어리들을 도장깨기 하듯 찾아다니는 부부 취미생활의 연장선이기도 했지만 수제맥주를 포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어머니에게도 수제맥주라는 것을 맛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맥주라면 일반적인 국산맥주만 드셔보셨을 어머니가 그보다 더 진하고 독특한 수제맥주를 드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했다.


더 랜치 브루잉은 유쾌한 프랑스인 주인장이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어도 유창해서 넉살 좋게 말을 걸어오는 그와 소소한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우리 맥주? 최고야. OO 브루어리에 가봤다고? 거긴 별로야. 내가 한잔 살 테니 이걸 더 마셔봐"

자신이 만든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주인장이었다.

탭 리스트에 있는 맥주들을 차례로 맛본 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샌드캐슬 골든에일'을 포장했다. 그리고 다음날 페트병에 담긴 샌드캐슬 골든에일을 들고 고향으로 향하였다.


고향에 오랜만에 방문하면 늘 당연한 것처럼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애주가이신 아버지와 아들보다 아버지에게 잘 맞춰주시는 매형, 그리고 술자리에 기름을 붓는 며느리가 모여 맛있는 술, 음식과 함께 오랜만의 대화를 나눈다. 가족들이 주고받는 술자리의 대화 주제라고 해봐야 그동안의 근황과 코로나 때문에 못 살겠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마지막은 늘 부모님의 잔소리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 아부지가 짧게 한마디만 하면.."라는 잔소리가 시작될 찰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랜치 브루잉에서 싸온 수제맥주를 꺼내 한 잔씩 따라 드렸다.

"뭐가 이렇게 쓰냐?"라는 반응부터 "이건 아주 고수들만 즐기는 맥주구먼"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사이 어머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알듯 말듯 한 표정에 별말씀이 없으셨지만 최소한 "웩. 이게 뭐니?" 하지는 않으셨다. 어쩌면 어머니의 맥주취향은 골든에일 쪽 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취향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런 시도조차 하실 겨를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내오셨을 것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취향이 무엇인지 알아가시도록 부모님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 더 랜치 브루잉의 수제맥주를 맛 보여드렸던 것은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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