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알콜 맥주 존재가치 단정

by 이백구십칠

백조를 아무리 많이 관찰했더라도 모든 백조가 희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 반증될 수 있다.

- <David Hume>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가능한 미루고 싶은 숙제와 같은 것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귀찮은 다이어트나 민방위 훈련, 관공서 서류 제출과 같은 종류의 것들. 건강검진도 그중 하나이다. 내 몸의 작동 능력을 점검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결함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참 고마운 일이지만 차가운 철제 의자에 앉아 피를 뽑고 갖가지 검사를 받고 의사 선생님의 잔소리..아니 조언을 들어야만 하는 불편한 자리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년 그래왔듯 올해도 '날이 좀 따듯해지면...',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끝나면...', '맘 편하게 휴가 다녀오고 나서...' 등등 갖가지 핑계로 건강검진을 미뤄왔다. 그리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당도해서야 밭일 나가는 소의 심정으로 터벅터벅 병원으로 향하였다.


간단한 부품의 전자 제품을 만드는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안내에 따라 차곡차곡 검사지의 체크 표시를 채워나갔다. 시력, 청력을 측정하고, 초음파 검사를 하고, 외계인의 실험 장치 같은 알 수 없는 기계들을 몸에 붙인 채 무언가를 체크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건강검진의 꽃, 건강검진의 피날레인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을 차례가 왔다. 받을 때마다 신기한 수면내시경이다. 분명 검사용 침대에 누워 의사 선생님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시간을 건너 뛴 것처럼 회복실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잠에서 덜 깬 채 몽롱한 상태로 대기하다가 정신이 돌아오면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검진이 마무리된다.

지금까지 받아온 검사는 늘 이렇게 비슷한 패턴으로 마무리되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마취에서 깨어나고 난 후 복부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던 중 간호사분이 이야기해 주셨다. 작은 용종이 발견되어 제거하는 수술을 진행하였다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기 통증은 사라지고 일상생활에 무리는 없어지지만 일주일 동안은 운동, 사우나, 흡연, 그리고 음주는 절대 금지라고.


아아. (지난번 코로나 백신 접종 이후) 벌써 올해만 두 번째 금주 기간을 맞이 했다.

지난번엔 상상 속 맥주 이상형 월드컵을 벌이며 어찌어찌 금주 기간을 버텨 내었지만 (*금주 기간의 맥주 이상형 월드컵과 우승의 향방 편 참고) 이번엔 또 어떻게 맥주의 유혹을 견뎌낼 것인가. 본격적인 금주에 들어가기도 전에 패배를 선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냉장고 가장 구석진 곳에 몇 달 전부터 있었던 칼스버그 논알콜 맥주의 존재가. 어느 날 아내가 SNS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한 박스의 논알콜 맥주를 들고 온 것이었다. 그런 아내를 한껏 놀려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논알콜 맥주라는 것이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고로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것인데 알콜이 들어있지 않은 술이라는 것은 달리지 않는 자동차, 텍스트 없는 소설책, 김치 없는 김치찌개와 다르지 않다며 한껏 논알콜 맥주의 존재가치를 폄하했던 것이다. (물론 논알콜 맥주에도 극소량의 알콜은 포함되어 있다)


경솔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무엇 하러 그런 깨방정을 부렸던 것인가. 논알콜 맥주는 술은 마실 수 없지만 맥주가 주는 청량한 쉼을 원하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필요한 존재였다. 냉장고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차가워질 만큼 차가워진 논알콜 맥주를 목 안으로 흘러 넘기자 진짜 맥주와 다를바 없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긴 시간 동안 냉장고 한구석에서 칼을 갈며 등장의 순간을 기다렸으리라.

세상에 무의미한 존재는 없다. 한시적 입장 차이가 있을 뿐. 각자가 놓인 입장에 따라 가치가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지금 당장 무의미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함부로 평가하지 말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치가 언제 슬그머니 얼굴을 내 보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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