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와 기네스&라거 하프앤하프

by 이백구십칠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머릿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잘못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을 고른다고 해도, 나는 결정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2010>




기네스와 라거 맥주를 반씩 섞은 하프앤하프 맥주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기네스를 사랑하고 라거를 마다하지 않는 나로서는 두 가지 선택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 맥주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잔의 맥주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늘 어떤 맥주를 선택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나였기에 두 가지 맥주를 물과 기름처럼 층을 내어 한 잔에 따라 주는 맥주는 최고의 선택인 듯했다.


실제로 받아 본 하프앤하프는 두 가지 맥주가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하단엔 황금빛 라거 맥주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위로는 검은빛의 기네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기하지만 어딘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이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 보았다. 익숙한 기네스의 맛이 조금 느껴지다가 이내 라거가 따라 들어왔다. 열심히 만들어주신 분께는 미안하지만 가시적 임팩트에 비해 맛은 놀랍지 않았다.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움도 라거 특유의 타격감도 아닌 애매한 맛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개인 취향 탓 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입에 맞으실지도..)

게다가 한번 들이킨 하프앤하프는 기네스와 라거가 뒤섞여버려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두가지 맥주의 장점만 취하는 하프앤하프를 기대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시 기네스 면 기네스, 라거 면 라거 확실하게 한쪽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다소 김이 샌 심정으로 하프앤하프를 바라보고 있자니 최근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두 가지 큰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며칠 동안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조직에서의 업무를 제안받고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현재 업무를 안정적으로 이어간다는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각 선택의 장점만 취하는 길을 골몰해 보지만 그런 길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만약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게 된다면 몇 가지 이득과 몇 가지 리스크가 따라온다.

지금보다 나은 현실적 조건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같은 것들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조직에서 지금만큼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은 없으므로 만만치 않은 리스크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포기하고 현재의 일을 이어 나간다는 선택 역시 이득과 리스크가 공존한다. 이미 적응 완료한 조직에서 큰 굴곡 없이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겠지만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을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언젠가 불쑥 찾아올 것만 같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익숙한 테마이다.

시도하고 후회할 것인가? 시도하지 않고 후회할 것인가? 우선 지금까지 개인적 신념은 '시도하고 후회하는 쪽'의 편이었다. 후회되는 시도일지라도 시도를 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보 전진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늘 '해볼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되면 해보는 쪽을 선택하는 일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만만치 않은 반론을 듣고 나서는 지금까지의 신념이 조금 흔들리게 되었다. 캐롯 작가님의 <삶은 토마토> 중 '바람떡' 에피소드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말이다.

"저질러 버리는 건 상황이 변한다는 뜻이고, 그 변한 상황을 후회한다는 뜻이잖아요. 포기한다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고..그러니까 저질러 버리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겠지만, 포기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지킬 수 있는 있는 거니까..나중에 덜 아프지 않을까요?"

일견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랜 세월 확고한 '하고 후회하자 파'였던 나도 흔들리게 하는 견해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확신은 흐려져간다. 탁하게 뒤섞여버린 하프앤하프처럼.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다. 조만간 선택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어느 쪽이건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선택하지 않은 방향에 대한 미련은 깔끔하게 버리고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을 더 단단히 만들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기네스 한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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