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운트플라워 Mar 26. 2022

결국 그 xxx는 나였다는 것을.

너 자신부터 알라

사람을 잘 파악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감도 꽤 좋아서 어떤 사람을 딱 보고 갖는 느낌이 곧 그 사람일 때도 많았다. 덕분에 주변 연애 상담 및 인간 관계에 대해 생각보다 깊게 조언해 줄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감성적으로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습관적으로 주변 눈치를 보며 자랐고,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날에는 끝없는 생각에 잠겨 그 날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로 예민했다. 이러한 예민함 덕분에 그동안 만난 사람들(동성, 이성을 모두 포함)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감정을 잘 캐치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잘 파악하는 그 사람들과 다름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게 자주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다. 장난일 때도 있었고 어느 날은 참다 참다 폭발해서 울부짖듯 얘기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말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나는 이기적이지 않으니까. 그렇게 믿어왔으니까. 힘들어하는 아내의 모습을 봐도 처음에는 그 모습조차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내에게서 찾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지쳐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의 나를 다시 돌아봤다. 내가 진짜 이기적일까? 내가? 나는 이타적으로 살며 다른 사람을 항상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어 물어 가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그럼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본인 기분만 생각하는 직장 상사, 아내를 힘들게 하는 직장 동료들, 애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 자신의 가족을 힘들게 하는 이들 .. 나는 이런 부류들의 성향을 매우 잘 파악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결국, 내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반증이었다. 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감정과 마음을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나의 아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주변에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 거였다. 그토록 욕하고 닮기 싫어했던 그 xxx들이, 바로 나였다.


나는 왜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을까? 이 해답을 위해서 결국 나는 또다시 내 유년시절을 돌아봤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달라'라는 생각을 늘 가슴 속에 가지고 자랐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극한 반감조차도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의 일부였다. 나는 결국 그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자랐다. 또한 주변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보며 겉으로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나도 그들과 한 패였다. 그래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꼴이 되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인정했어야 했다. 변화의 시작은 그 문제를 직시하는 순간부터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끝없이 번뇌가 찾아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행위 자체가 나는 이기적인 사람임을, 좋은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이 글을 끝까지 써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이다. 9할의 불편한 마음보다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1할의 편안함이 더 값지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아는 순간부터, 내가 어리석인 인간임을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나 자신은 변화를 시작한다. 또한 내가 누구보다 더 잘 파악하는, 그 어리석은 부류의 인간들과 구분되는 순간이다. 행복은 인생의 여정에서 끝없이 나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시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