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데미안에게 묻다.

by 문홍

2025년 1월.

나는 다시 데미안을 꺼냈다.

중학교시절부터 이어져온 데미안과의 인연은 쉰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숨바꼭질 중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내내 나는 더 심한 방황을 했다.

선생님과 있었던 시간들이, 그때의 감정들이 나에게는 쉽게 놓아버릴 수 없는 어떤 의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는 정신없이 '데미안'에 매달렸다.

선생님은 왜 나에게 '데미안'을 남겨두고 떠났을까......


중학교2학년 봄, 나는 예쁜 교생실습 선생님과 만났다.

그때의 나는 철없는 사춘기를 겪으며 있는 데로 잔뜩 독이 올라있는 여느 여중생이었다.


교생선생님은 각 반에 배정되어 담임선생님의 보조 선생님 역할도 하셨다.

어느 날 교생선생님으로부터 상담일정을 전달받았다.

유난히 말이 없고 교우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따뜻한 봄 햇살이 한 줄 비추는 상담실에서 나는 교생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야리야리한 선생님의 모습, 긴 머리를 찰랑 늘어트리고 곱게 앉아계셨던 그 보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요즘도 책 많이 읽어?" 라며 시작된 선생님의 질문.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은 놀란 듯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셨는지,

"담임 선생님께서 상담 전에 반 학생들 생활기록부를 보여주셔서....."

선생님은 미안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셨다.

"교과서나 뭐 참고서 같은 책은 안 보고 소설이나 그냥 재미있는 책들만 보는데요."

퉁명스럽고 차가운 말투로 나는 대답했다.

왜 그렇게 선생님을 대했는지 모르지만 '뭘 알고 싶은 건데요?'라는 말이 숨어있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던 것 같다.

"요즘은 그럼 어떤 소설 읽어?"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니 망설였다.

아직 중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사회성이 짙은 폭력과 복수의 피바람이 담긴, 또 거기서 일렁이는 로맨스의 어떤 묘사들이 거칠었고 선정적이었다. 이런 책들은 청소년추천 도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괜찮아, 말해도 돼."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선생님은 눈치채신 듯했다.

"인간시장,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고 난지도..... 아! 시집도 읽고 에세이도 읽어요. 이해인 수녀님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같은..."

내 마음은 무엇을 숨기고 싶었을까?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도 읽는다고, 그분의 에세이도 읽는다고 마지막에 힘을 주어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마음 안에서 작은 물결이 일었다. 나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랬구나..." 선생님은 짧은 순간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는 듯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실 거라고 짐작을 했을까? 그래서 시집이나 에세이도 읽는다고 힘주어 말한 걸까?

"저, 선생님 오늘은 그만하고 먼저 나가봐도 될까요?"

"어디 불편해?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누자!"

나는 그 어색한 자리에 불편함을 느꼈고, 단아하고 예쁘게 앉아계신 선생님 머리 위로 눈부신 햇살이 부서지면서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나는 서둘러 의자를 정리하고 그곳을 나왔다.

그 뒤에 이어진 두 번의 상담시간도 나는 여전히 불편했고 나의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은 채 건조한 말들로 선생님과 마주했다.


나는 교생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나'스스로에게 들켜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불편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짙은 회색빛의 뿌연 마음속에서 햇살처럼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그런 마음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마음 안의 독기 가득한 뾰족한 감정들만이 그대로의 '나'라고 생각했었다.


선생님과 첫 상담시간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꺼내 들었을 때 내 안의 불편한 감정이 어떤 형태였는지 나중에 알아차렸다.

(어쩌면 지금 내 앞에 계신 선생님은 내 안의 숨겨진 마음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사실 그 마음을 들켰다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유약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유약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숨기고 있던 그런 때였을 것이다.)


어느덧 계절이 여름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선생님과 나의 상담시간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들만 오갔다.

선생님이 듣고 싶었던 것은 나를 포장해 놓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철없는 사춘기 소녀의 반항심으로 표출되는 그런 구태의연한 말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포장하기에 적합한 내가 읽은 책 속에서의 '나'만 꺼내놓았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과 마지막 상담시간을 마주했다.

그래도 몇 번의 상담과 선생님과의 수업이 있었던 탓일까? 처음보다는 밝고 조금은 수다스러워진 '나'도 그곳에 있었다.

"오늘 마지막 면담인데 선생님은 네가 아주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아."

그 말이 뭐라고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선생님은 말없이 티슈 한 장을 뽑아주시며 말씀을 이어서 하셨다.

"언젠가 네 스스로 '너'를 말하고 싶어지는 날이 올 거야. 그게 언제든, 그때는 꼭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을 너는 있는 힘껏 달려 나가고 있는 중이고 그 과정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너는 숨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너의 이 순간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줄래?"

그리고 선생님은 나에게 '데미안'을 건넸다. 그것이 '데미안'과 첫 인연이 되었다.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숨기고 싶던 내 마음의 정체를..... 그리고 그것은 '나'와'내'가 마치 알에서 깨어나기 위한 성장의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렇게 숨기고 있는 '나'의 정체를 선생님은 소중히 지켜주셨던 것이었다.

선생님의 마음이 내 안에 뭉클하게 담겼다.


선생님이 주고 가신 '데미안'은 나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문장마다에 꼭꼭 숨겨놓은 그의 진심, 본질.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해석을 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을 또다시 나는 예리한 송곳으로 후벼 팠다.

온갖 상투적이고 폭력적인 말들로 시원한 사이다를 날리던 그동안의 책들과는 사뭇 다른 난해한 문장과 표현들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내가 사춘기시절 '나'와 치열하게 갈등을 벌이고 있을 때를 '헤세'는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여전히 나는 아브락사스를 품고 있는 그 알에서 깨어 나오지 못한 것일까?

쉰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복잡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할 때 어김없이 데미안을 꺼내든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릎을 '탁'하고 칠만한 명쾌한 해답이나 깨달음을 준 적이 없다.

오히려 복잡한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데미안을 꺼내드는 이유는 매번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데미안을 읽고 있으면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나의 말을 그가 다 듣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굳이 어떤 문제를 놓고 선과 악, 옳고 그름, 당위성과 필요성 같은 본질적인 성격을 판단해야 될 때,

나는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진짜'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출처 Pinterest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