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태풍이 오기 전 느껴지는 고요함은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듯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지나가는 바람 한 점도 서슬 퍼런 태풍의 고요 속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것임을 알 것이다.
낮게 깔린 검은 구름,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공기의 축축함, 평소와 달리 하얀 거품을 남기지 않고 두껍게 일렁이는 파도는 곧 엄청난 파괴력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조를 예감케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파도가 덮쳤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틀리지 않는 예감은 나의 오만방자한 얼굴의 가면을 거침없이 벗겨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런 날들 중에 어느 날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출렁거리다가 태풍이 지나가면 상처를 복구할 요량이었다.
그 정도는 몇십 년 자영업을 하던 촉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출렁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틀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꺼운 파도 속에 숨겨진 거대한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내 삶을 삼켜버렸다.
정신 차리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상황을 바라봤지만, 그것들은 마치 나를 보면서 조롱하듯 비웃었다.
'너 따위가 감히!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어떤 표현으로 이 상황을 자세히 묘사해 볼까 아무리 찾아도 나의 어휘력으로 어림없는 현실이 그것이었다. 온갖 그럴싸한 단어들을 조합해도 표현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 같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고난이자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 비참한 현실에 나는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믿지도 않는 온갖 신들을 증오하며 내 안의 분노는 얼음송곳보다 더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댔다.
그 상황에 고스란히 매몰된 채 깊이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깊은 동굴에 숨어서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차단한 채 홀로 긴 사투를 벌였다.
이혼, 무너진 사업, 철저히 외면당한 인간관계, 그리고 남은 건 처참히 버려진 나.
누구에게 하는지 조차 모르는 "왜?"라는 질문을 끝도 없이 반복했다.
"왜, 내가?"
"왜, 뭘 잘못했는데?"
"왜, 이런 상황을 내가 감당해야 되는데?"
"왜?"
분노와 원망에 울다 지쳐 잠이 드는 날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비쩍 마르고 푸르스름한 기미가 잔뜩 끼어 있는 이상한 여자를 발견했다.
양볼이 움푹 파인 얼굴에 퉁퉁 부어오른 두 눈덩이는 흡사 에바르트 뭉크의 절규 속 인물과 닮아있었다.
어느새 자라난 머리카락에서 은빛새치들이 비닐하우스처럼 반짝거렸다.
처참해진 몰골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내 나이 쉰 하나.
여기서 끝인가…. 이러려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만약을 위해 살지 못했을까?
나는 왜 항상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만 최선을 다했을까?
이런 날이 올 줄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왜 내 인생은 항상 꽃 밭일 거라고 믿었을까?
이렇게 달리고 달리다가 내가 다다를 곳이 벼랑끝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 어떤 준비도 없이, 이렇게 가차 없이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질 것 까지야 없지 않았을까….
그것도 꽃같이 젊은 날을 뒤로하고 이제 한껏 여유 부리며 살아가도 모자랄 나이에 운명의 장난처럼 날아든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나 다운 것인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쉼 없는 삶이었다.
또렷한 내 기억에 다섯 살 그때부터 내 삶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애씀의 연속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다독이며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내 것 지키며 자존심, 자존감 챙겨가며 나름 의미있는 삶을 만족하게 꾸려가려고 애쓰는 삶을 살았다.
'화양연화'
나의 마지막은 '화양연화'였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살다가는 것이 내 생의 목표이자 꿈이었다.
누군가 지난 날들 중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을 꼽으라고 해도 나는 단 하루도 되돌아가고 싶은 날이 없었다.
그 하루하루가 나는 최선을 다한 날들이었다.
누가 감히 내가 살아온 날들에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그것이 혹 실패였다 하더라도….
구해지지 않는 답을 나는 묻고 또 묻고 있었다.
내 안에 분노는 매시간 쉬지 않고 나를 깊은 수렁으로 끌고 내려갔다. 한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감정은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죽을 결심을 하고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마음은 무겁지 않았고 어떤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마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눈물 한 방울도 사치라고 생각하던 그 때 어렴풋이 내 안의 깊은 어느 한 구석에서 ‘살고 싶다’라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냥 ‘살고 싶다’라는 단순한 말이 아닌 어느 깊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내 피부를 통해 소름 돋게 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이 심장을 뭉클하게 움켜쥐고 가슴을 뻑뻑하게 조여왔다.
뜨겁고 진득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 나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이 내 온몸을 돌며 자극했다.
얼음송곳으로 가슴을 후벼파듯 어딘가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은 가슴을 뜯어내고 싶을 만큼 낯선 고통이었다.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의 모습처럼 몸을 활처럼 웅크리고 방바닥을 빙글빙글 돌며 무거운 숨을 토해내듯 그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그토록 살고자 원했던 깊은 내면의 나를 꺼내기란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 현실을 마주하는 것 보다 훨씬 두렵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기억들을 꺼내며 그날들의 장면들을 마주 본다는 것은 내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아픈 상처들을 다시 겪어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나의 다섯 살 꼬마부터 시작된 상처들을 과연 내가 마주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두려움이 시작됐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 마음 안에서 서로 먼저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내려고 아우성치고 있는 소리를 이젠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용기 내지 않으면 누구도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두려움을 차례차례 마주하면서 그 짐들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유'를 찾겠다고 나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