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햄릿': 효자지만 여성혐오주의자

르네상스 시대 햄릿을 현대인이 읽어야 할 이유는?

아마도 영미문학을 포함한 서구문학에서 최고의 명작을 꼽으라고 하면 매번 빠지지 않는 작품 중 하나가 '햄릿'일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덴마크 왕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비극적 희곡인데 소설로, 영화로, TV드라마로,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었고 동서양의 문화를 뛰어넘어 각국의 고유한 풍토에 맞게 번역되어 재창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덴마크 왕자의 복수와 죽음이라는 비극을 2020년대 한국에 사는 평범한 독자가 읽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도 외국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이국적인 정서가 주는 매력이 큰 것 같다. 머나먼(요새는 해외여행 다녀온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신분이 평범하지 않은 고귀한 왕이나 왕자, 귀족들이 펼치는 운명의 대서사시를 읽다 보면, 잠시나마 범속한 우리의 일상을 잊고 작품 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궁정과 잔인한 음모,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감상하며 머나먼 이국으로 시간여행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햄릿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은 이러한 이국적인 정서가 우리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형의 권력을 탐내 형을 암살하는 동생이나, 그런 시동생과 결혼하는 왕비나... 우리가 TV 막장드라마에서 흔히 보았던 소재들로(아마도 권력다툼이나 불륜 같은 소재는 인류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했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문화의 공통된 요소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잠자는 형의 귀에 독약을 붓는 동생이나 새로운 시동생 왕을 남편으로 맞이하는 왕비를 보며 깜짝 놀라면서도 "인간이 다 그렇다니까"하는 체념 섞인 푸념을 내뱉게 된다.


그러나 인간 삶의 범속하고 찌질한 측면만을 보여준다면 그 작품이 명작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햄릿의 기념비적인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보면 햄릿이 부왕의 죽음과 어머니의 패륜에 괴로워하면서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데, 사실 현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하거나 불합리한 조건 속에서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한 번씩은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 - 그것이 문제구나. 가증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그냥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밀물처럼 밀려드는 역경에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이 더 고귀한 행동인가, 죽는 것은 잠드는 것 - 그뿐이다. 일단 잠이 들면 마음의 고통과 몸을 괴롭히는 수천 가지 걱정거리도 그친다고 하지. 그게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야. 죽는 것은 잠드는 것 - 잠이 들면 - 아마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문제군. 현세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 죽어서 잠이 들면 그 어떤 꿈을 꾸게 될지 몰라 망설일 수밖에 없어. 이런 생각 때문에 오랜 세월 지긋지긋한 삶에 매달리지. 그게 아니라면 어느 누가 이 세상의 시달림을 참고 견딜까?

- 햄릿, 3막 1장


여기서 햄릿은 구차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할지, 아니면 잠과 같은 죽음을 택할지(사실 숙부의 암살은 심증이 불과할 뿐 아직 확증된 사실이 아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햄릿의 이런 지연하는 모습은 지나친 사유 속에서 행동을 유보하는 현대인의 머리만 굵은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이어지는 3막 2장에서 햄릿은 유명한 극중극 '쥐덫'(이 연극은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선왕을 죽인 행동을 그대로 재연한다)을 숙부 앞에서 공연하고 당황하는 클라우디우스의 모습을 통해 그의 범죄를 확신하게 되는데, 클라우디우스 역시 레어티즈를 통해 햄릿을 죽일 계획을 세웠기에, 햄릿은 안타깝게도 레어티즈의 독약 묻은 칼에 찔리게 된다. 그리고 햄릿은 죽기 직전 간신히 독 묻은 칼로 클라우디우스를 찌르면서 복수에 성공하게 된다.


햄릿, 클라우디우스, 왕비 거트루드(독이 든 잔을 마시고 죽는다), 햄릿을 사랑한 오필리아,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우스 등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죽고 마는 이 비극에서 우리는 연민과 공포라는 감정의 요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낌과 동시에 삶에 관한 교훈을 하나 배우게 되는데 그 교훈이란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5막 1장을 보면 오필리아의 무덤을 파는 묘지기들이 햄릿이 어렸을 때 그를 거의 키우다시피 했던 궁정광대 요릭의 해골을 발견한다. 햄릿은 한때 그를 즐겁게 해 주었던 요릭이 죽어서 한낱 뼈다귀로 변한 것을 보고 삶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읽는 독자들도 죽음의 보편성과 삶의 유한함을 깨닫게 된다.


결론적으로 햄릿은 중세 유럽이라는 이국적인 체험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권력과 애증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과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명작의 요소라고 할 인류보편적인 정서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더불어 짧은 인생과 죽음의 보편성을 숙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깨닫게 한다.


후기. 그나저나 햄릿은 재혼한 어머니를 계속적으로 창녀에 비유하며 사랑하는 오필리아에게 결혼하느니 차라리 수녀원에나 가라며 독설을 퍼붓는데, 선왕에게는 지극한 효자지만 여자에게는 좀 잔인하게 구는 여성혐오주의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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