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대중 리뷰어들과 쫓겨나는 평론가들
창비의 백낙청 교수님, 문학과 지성사의 김현 교수님과 더불어 서울대 문학평론가 3인방의 한 축이셨던, 지금은 작고하신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선생님께서 소설가 박완서에 관한 작품평론집에서 다음과 같이 평론가의 숙명적 기생성을 논하신 적이 있다.
잘 설명할 수 없으나, 내가 살아오면서 한 일 중, 제법 잘할 수 있고 또 즐겁기도 괴롭기도 한 것이 있었다면 남들이 쓴 작품 읽기와 그것에 대한 쓰기였던 것으로 회고되오. 어째서 한 줄이라도 자기 글을 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가,라고 누군가가 짓궂게 묻는다면 이 또한 잘 설명할 수 없소. 자질이 모자랐다든가 게을렀다든가 틈이 없었다든가 등등이 어찌 감히 변명 축에 들 수 있으랴. 좌우간 그렇게 되고 말았소.
- 내가 읽은 박완서, 김윤식 지음
나 역시 창작글을 쓰지 못하고 리뷰를 쓰는데, 사실은 글과 사생활을 분리시키는 방법을 모르는지라 습작 하나 쓸라치면 나의 소소한 일상생활과 습관까지 다 까발려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글에 기대어 나의 알량한 지식이나 생각을 늘어놓게 된다.
요즘은 블로그와 유튜브가 성행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리뷰를 올리게 되었고,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시대사상을 이끌었던, 비평이니 평론이니 하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하고 곧 퇴장해야 할 늙은 병사처럼 여겨지게 되었지만,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9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가와 사회정치계에 이념과 사상의 논쟁이 남아있었고 젊은이들은 각자의 진리를 찾아 사회과학과 문학과 종교를 파고들었다 (나 역시 인문계 대학원에 진학해서 위에 언급한 평론 대가분들께 수업을 들었는데 김윤식 교수님은 학부 때 들었고 백낙청 교수님은 대학원 때 들었다. 김현 교수님만 유일하게 수업을 듣지 못했는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일반 대중이 모두 리뷰어가 된 현대에 평론의 의의는 무엇이며 평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각종 첨단 방송장비와 편집기술을 갖추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비학술적 엔터-리뷰어와, 인문학을 전공했으나 얼굴빨 말빨 받쳐주지 않기에 개인 블로그에나 글 끄적거리는 그림자 평론가 중에 미래에 더 나은 전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자칭 평론가라는 자들이 대중 위에 올라서서 대중을 가르친다는 오만한 선민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중은 더 이상 어리석지 않으며 평론가 못지않은 전문적 지식과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또한 평론은 더 이상 현학적인, 말장난을 위한 말장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의 추세와 문화의 변화를 따라잡으면서 쉬운 언어로 대중을 품어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쉽게 풀어쓰면서도 작품을 바라보는 본인만의 시각을 확고히 견지하는 것이 평론의 본령이라고 여겨지는데, 최근 책 한 권을 읽다가 나의 관점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내가 웬만해서는 손에 잡은 책은 끝까지 읽는 편인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독서 중에 도중하차한 것이다. 물론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언어유희와 지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리고 나보코프가 남자주인공과 일종의 거리두기 설정을 해두었다 치더라도, 성도착증적인 남자주인공의 생각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내가 지나치게 도덕주의자인 것인가.)
어쩌면 평론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만 읽고 이해하면 되지 남까지 가르치려는 것은 오지랖이 아닌가. 그렇지만 어쩌랴. 책을 읽으면 자꾸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기록에의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