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잊을 수 없는 평론가 교수님들 (3)

로버트 스탐 교수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아야 한다. 용기를 내어 써보지만 쓰면서도 계속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때는 바야흐로 1997년 가을, 영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학연수를 거쳐 미국 뉴욕의 영화학교에 입학했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 뉴욕! 나는 홀로 남겨진 고아 같았다.


영어를 전공했지만 회화에 익숙지 못했고 영문학에서 영화학으로 전공을 바꿨기에 전공 지식도 전혀 없던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IMF가 터져서 환율이 2천 원까지 치솟았고 경제적인 압박을 느낀 나는 생활비를 줄이려고 식비를 긴축했으며 책값을 아끼느라 복사가게를 들락거렸다.


사람이 수중에 돈이 없으면 위축이 되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 법. 나는 차가운 뉴요커들 앞에서 쭈뼛거렸고 영어로 토론을 하고 수십 장의 페이퍼를 써내야 하는 학과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서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나의 지도교수는 로버트 스탐이라는 중년의 백인 남성 교수님이셨는데 이분은 수강신청하러 가끔 들르면 "여기 생활이 힘들지요?"라고 다독이는 말씀을 해주었고 나는 속으로 감정이 북받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아네트 마이클슨이라는 냉정한 할머니 교수님 수업을 좇아 다니느라고 정작 나의 지도교수님한테 관심이 없었다. 미국 학생들하고 좀 교류를 했으면 스탐 교수님 평판을 들었으련만 나는 항상 도서관에 처박혀서 영화 비디오만 봤던 것이다.


로버트 스탐 교수님이 단지 성품 좋으신 잘 생긴 교수님이신가 보다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서점에 가서 영화이론 섹션을 훑어보다가 그분이 저술하신 책 수십 권이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랑스 영화를 비롯한 유럽 영화, 브라질 영화를 포함한 남미 영화,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주의, 문학의 영화로의 각색에 관한 저서, 영화기호학책, 바흐친의 다성주의에 관한 저서, 인종주의와 문화 연구 등등...


로버트 스탐 교수님이 이토록 훌륭한 학자이실 줄이야!! 나는 다음 학기 바로 스탐 교수님의 '영화와 문학' 수업을 신청했고 이때 본 첫 번째 영화가 바로 프랑스 누벨 바그의 선구자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이었다.


로버트 스탐 교수님이 필자를 거의 기억도 못하실 터이고, 중퇴자에 불과한(드디어 고백한다) 내가 그분의 학문적 성과와 특징을 논할 자격도 없지만, 감히 스탐 교수님의 이론적 성향을 요약하자면 '반성적 백인 지식인의, 인종과 문화를 건너지르는, 다성적 대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스탐 교수님은 또한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이, 환영에 지나지 않는 화면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낯설게 하기와 관객에게 직접 말 걸기 등의 반환영적이고 실험적인 모더니즘 기법을 옹호하셨는데, 이것은 거칠게 말해서, 리얼리즘이 단순한 사실 재현이 아니라 비판적 현실인식이라고 본 백낙청 교수님의 입장과는 크게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로버트 스탐 교수님은 김성곤 교수님처럼 문학과 영화의 관계에 상당히 관심이 많으셨다. 김성곤 교수님의 경우는 미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로 문학과 영화를 분석하셨고, 로버트 스탐 교수님은 문학의 영화로의 각색 과정에 있어서 나타나는 텍스트의 확장과 변용을 상호텍스트성, 트랜스텍스트성 등의 기호학 용어를 사용하여 분석하셨다. 김성곤 교수님과 로버트 스탐 교수님은 또한 미국문학 전공자 또는 미국인으로서 (사실 로버트 스탐 교수님은 상당히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계신데 미국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교육받으셨으며 브라질 영화 전문가라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포르투갈어를 모두 구사하신다) 흑인 문화와 인종적 혼종성에 친연감을 느끼시는 듯했다.


그나저나 이렇듯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두고도 학위를 따고 돌아오지 못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나는 참 바보인데, 김성곤, 백낙청, 로버트 스탐 이렇게 세 교수님들의 강의는 내가 학교를 떠난 후에도 거의 20년 동안이나 내 뇌리에 남아서 혼자서 교수님 저서를 구입해서 뒤적여보기도 하고 수업시간에 봤던 영화를 되돌려보기도 했다.


과연 그 교수님들은 강의실 구석에 앉아서 모자라는 머리로 나름 수업을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쓰던 존재감 없던 나를 기억하실까? 아마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그리고 이렇게 끄적거리는 글을 볼 일도 없으시겠지만 뒤늦게나마 말씀드리고 싶다.


"교수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교수님의 학문적 성취와 학생들을 향하신 열정을요. 모자란 학생이었지만 교수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7. 잊을 수 없는 평론가 교수님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