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점을 앞둔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
“잘 지내요? 직장은 잘 다니고 있어요?”
전에 일하던 편의점 점주님에게 연락이 왔다. 직전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꽤 오래 다니던 곳이다. 망설이다가 거짓말을 했다. “네, 잘 다니고 있죠.” 아직 내 세 번째 퇴사 사실을 주위에 밝히고 싶지 않다. 왜 또 회사를 나왔는지, 이제부터 뭘 할건지,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이 자연스럽다는걸 알지만, 거기에 매끄럽게 답할 재주가 내겐 아직 없다.
점주님은 편의점이 곧 폐점한다고 했다. 그런데 폐점을 고작 3주 남기고 주말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뒀나보다. 폐점을 앞둔 편의점이 구인 공고를 올리기는 애매하다. 폐점 전까지 주말 오전 자리가 비는데 혹시 일해줄 수 있겠느냐고, 점주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말에는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을 직장인의 입장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이제 직장인은 아니다. 하지만 해야할 일은 있었다. 이번 주까지 쓰기로 한 글을 마감하는데 무리는 없을지 계산해봤다. 만에 하나 주말 전까지 글을 끝마치지 못할 경우도 가정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차피 주말 오전에 뭔가를 가열차게 쓰기는 힘들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느니 아침 운동을 겸해 소소하게 벌어서 나쁠 것은 없다. 빨리 일을 끝내면 편의점에서 마저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점주님에게 출근하겠다는 카톡을 보냈다.
토요일 아침, 오랜만에 편의점 문을 열었다. 업무 지구에 위치해 있어 하루 18시간만 운영하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반년 넘게 떠나 있었으니 일하면서 헤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몸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매장 실내등을 켜고, 포스기 시재 점검을 하고, 새벽에 들어온 물건들을 착착 검수하고 정리했다. 하긴, 이 편의점에 1년 반을 넘게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여기 처음 왔을 땐 그렇게 오래 머물 줄 몰랐었다. 아마 재취업을 하고 싶기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던 애매한 마음 때문이었겠지. 아니, 실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안 하면 어떻게 할거냐는 스스로의 반문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적당히 취업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기회를 얻어 세 번째 직장에 들어갔고, 7개월 후 다시 나왔다.
세 번째 회사에 다녔던 날들이 꼭 꿈처럼 느껴진다. 어젯밤 잠들어서 회사에 다니는 꿈을 꾸고, 아침에 눈을 떠 늘 그랬듯 편의점으로 다시 출근한 것만 같다. 이곳에서 편의점 일 말고도 여러가지를 했다. 취업 준비용 공부도 했지만 다른 책도 꽤 읽었다. 언론사에서 두 번 퇴사한 경험을 담은 내 첫 에세이집도 70% 정도는 여기서 썼다. 이곳이 곧 문을 닫는다니 마음이 이상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내게 준 의미는 길을 잃어있을 때, 방향을 가늠할 여유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편의점이 바닥을 받쳐주는 동안, 진작 그렇게 했어야 했다. 취업 안 하면 어쩔거냐는 반문이 막막했더라도, 굴복하는 대신 그 답을 준비했어야 했다. 나는 소중한 시간을 마음 가지도 않는 어정쩡한 취업 준비에 써버렸다. 다시는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딘가에 소속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자기 리듬에서 벗어나면 쉽게 고장나는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혹은 타의에 의해 리듬이 널을 뛰면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러 번 확인했듯, 이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불리한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늘리고, 쉽게 고장나고, 무력감만 강해졌다. ‘변화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옳을지는 몰라도, 지금 내겐 소용이 없다.
이제 나는 주위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 생각하며 글쓸 수 있다. 해소되지 않는 구름으로 가득한 내 안을 살펴보고 갈피를 잡을 것이다. 마음에 닿는 일을 배우고 경험하며 나를 채울 것이다. 그게 내가 만들 수 있는 변화다.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피한다면 어딜 가든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너는 아마 평생 생각해도 모를거야”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본가로 내려간 내게 엄마가 말했다. 좀처럼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는 자식이 속상하실 테니 무슨 말을 해도 묵묵히 듣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럼에도 저 말은 아팠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진짜 계속 모르겠으면 어쩌지.
불안하고 자신없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되고 싶은 사람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