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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하 May 15. 2022

그날의 달리기

2년 만에 마스크를 벗고 뛰었다


해질녘 하늘은 파르스름하면서도 어딘지 불그스름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해가 졌지만 아직 캄캄해지진 않은 시간대였다. 낮이 길어진 만큼 점등 시간이 조정되지 않았는지, 가로등엔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잠원 한강공원 전체에 활기가 가득했다. 요즘 한강공원은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늘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러닝 크루 모임 시간까지는 약간 여유가 있었지만, 왠지 달리고 싶어졌다. 남은 거리를 뛰어서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여느 날처럼 삼삼오오 모여 셀카를 찍고 안부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몇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늘 보는 비슷한 장면이었지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뭔가 평소보다 조금씩 더 들떠 보였다. 오랜만에 이례적으로 많은 인원이 모여서 그랬을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자 러닝 크루에서는 ‘홈커밍 데이’를 열었다. 예전에 나왔지만 한동안 출석하지 않던 사람들, 회원들이 초대한 게스트들을 합쳐 무려 80명이 넘게 모였다. 이제껏 러닝 크루에서 본 것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일곱 그룹으로 나뉘어 차례로 시끌벅적하게 출발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꼭 오프라인 마라톤 대회가 다시 열린 것 같았다.


내가 속한 그룹도 곧 그 대열에 합류했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 너무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아 딱 알맞다고 느꼈다. 이제 실외에선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 안 탁한 공기 대신 상쾌한 바깥 공기가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저녁 공기에서 여름이 살짝 덧입혀진 봄 냄새가 났다. 어쩌면 오늘따라 다들 더 상기돼 보였던 것도, 참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뛸 수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강변에 돗자리를 깔고 촘촘히 앉아 있던 무리 중 하나가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고개를 돌리니 그쪽에서 “화이팅!”하고 먼저 외쳤다. 다른 러닝 크루를 마주칠 때 약속처럼 주고받는 인사지만, 러너가 아닌 사람들이 그랬던 적은 좀처럼 없어서 놀랍고 기뻤다. 그들도 우리처럼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마침내 다시 이런 날이 돌아와 준 것에 대해 말이다. “일기 써야 할 것 같은 날이네요” 누군가 말했고, 깊이 공감했다. 저 앞 반포대교 무지개 분수가 형형색색 조명을 받으며 터널 모양으로 쏟아졌다. 우리는 곧 그 밑을 통과해서 달렸다.


힘들지도 않은지 30초마다 한 번씩은 외치는 듯한 “화이팅!” 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느낄 만큼 쿵쿵 울리는 비트 강한 음악도, 흥에 넘쳐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고 춤추며 달리는 크루 사람들까지도. 그날의 모든 것이 좋았다. 달리는 내내 신이 났고, 함께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반환점에서는 땀이 다 식을 만큼 길고 긴 포토 타임이 이어졌다. 평소였다면 속으로 조금 별로라고 생각했을 텐데도 그날은 흐뭇하게 그런 사람들을 바라봤다. 눈 아래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가 없어서 모두의 표정이 온전하게 보였다. 오후까지 다른 안 좋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분명히 이 저녁만으로 기념할만한 하루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세상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일상은 생활 속에서 계속 방역을 실천하는 겁니다.” 벌써 2년도 더 전에 정부 발표를 듣던 기억이 난다. 한두 달이면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19가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불안해지는 마음 한구석을, 정부가 공식적인 현실로 못 박아준 느낌이었다. 발표를 듣고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 이것이 우리의 새 디폴트다. 믿기지 않고 슬프지만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헛된 기대를 계속 품고 있으면 나중에 더 크게 실망할 테니까. 그런데 결국 마스크 벗고 달리는 날은 시나브로 다시 찾아왔다. 물론 언젠가 또 써야만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의심할 필요 없는 현실이다.


물론 좋은 시절이 인생에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항상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좋은 날이 결국 오고 말 것이라면, 그런 날은 이제 오지 않는다고, 불확실한 희망은 잊어야 한다고 부득부득 되뇌어도 끝내 내 앞에 도착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 직감을 믿어보고 싶다. 그럼 적어도 그날을 준비하는 일이 좀 더 수월하고 즐거울 것 같다.


저 멀리 서울 웨이브 아트센터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착 지점이 1km도 채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이제부터는 자유 질주 구간이었다. 조금 더 속도를 내기로 했다. 다만 평소처럼 전력을 다해 달리지는 않았다. 그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더 즐길 정도로만 속도를 높였다. 선두 그룹은 이미 나를 저만치 앞질러 갔다. 하지만 따라잡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좋을 수 없도록 선선하게 바람이 부는 상쾌한 봄날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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