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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하 Mar 24. 2022

열심히 달려도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린다는 것에 희망을 건 적이 있었다. 아무 대안도 없이 도망치듯 첫 직장에서 나온 뒤였다. 20대 거의 전부를 바쳐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어느새 일터에서 당장 오늘 내일을 견디는 데만 급급해져 있었다. 그런 하루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도 힘들게 합격한 직장을 포기할 수 없어서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은 마음에 병이 났다. 백기를 들고 사직서를 썼다. 이제 모든 것이 고갈되었으므로, 그 어떤 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나를 움직이던 가장 큰 동력이 이토록 허무하게 꺼져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들르던 동네 수제맥주 펍에서 포스터를 하나 발견했다. 펍에서 러닝 크루를 만들었는데 함께 달릴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서 종종 보이던 러닝 인플루언서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다수는 인생의 힘든 기간을 달리기를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고 했다. 꽤 오랜만에 가슴 한켠이 두근거렸다. 나도 어쩌면 달리기로 뻥 뚫린 마음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달리면서 힘을 되찾는다면 어쩌면 인생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러너가 되었다. 기대했던 대로, 분명히 달리는 순간만큼은 좋았다. 같이 뛰는 따뜻하고 진취적인 사람들에게서 받는 에너지, 직장 일과 달리 뛰는 만큼 정직하게 실력이 늘고 있다는 체감, 고통스러운 구간을 넘어선 어느 순간 찾아오던 고양감과 자유로움은 분명 매혹적이었다. 무엇보다 호흡과 페이스를 조절하며 완주까지의 과정을 통제한다는 감각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내 인생이 변화할 차례였다. 러닝을 하며 느낀 이 감각을 삶에 적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뛰는 동안은 마치 새 인생을 살아갈 힘으로 충만해지는 듯하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똑같았다. 달리면서 기분이 좋았다고 와닿는 다음 목표가 세워지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얻는 데 필요한 노력과 고통을 달릴 때 발휘한 인내심으로 갈음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잘 달리고 돌아와도 인생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전혀 다른 근육이 필요했다. 당연하게도, 러닝은 러닝이고 나머지 삶은 나머지 삶이었다.


어찌어찌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갔지만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또 그만뒀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예전보다 더 긴 거리를, 더 빠르게 주파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달리기로 삶이 바뀌는 마법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숱한 러닝 인플루언서들이 전파하는 복음대로, 달렸을 뿐인데 삶이 변하는 것이었다면 내 인생은 첫 퇴사 후 러닝에 빠졌던 그때 반등해서 이미 제 궤도로 돌아갔어야 한다.


어느덧 이제 두 번째 퇴사를 한 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준비하던 회사 채용에서는 얼마 전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꽤 오래 준비했는데 필기시험을 볼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실은 뭔가를 하긴 해야 해서 준비했을 뿐 그리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내 안엔 이렇다 할 동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 어느덧 내 나이는 30대 초반을 넘겼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찾는 것처럼 나는 또 러닝을 찾았다. 아무리 막막해도 뛰는 동안 만큼은 내 문제들을 잠시 한쪽에 치워둘 수 있었다.


잠깐 ‘위드 코로나’ 이야기가 나오는 듯싶더니, 작년 연말 다시 거리두기가 강화돼 4인 초과 사적 모임이 금지됐다. 종종 참석하던 러닝 크루들이 죄다 운영을 중단했다. 사적 모임 제한을 비껴갈 수 있는, 학원업으로 등록된 유료 러닝 모임을 찾아내 결제했다. 러닝 앱에 개설된 방에 자기 계정을 연결하고, 각자 설정한 목표 거리를 4주간 달리는 모임이었다. 앱에 참여자들이 달린 거리순으로 등수가 표시되긴 했는데, 상위권에 든다고 뭘 주는 건 아니었다.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그게 설령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1등을 꼭 하고 싶었다. 앱 화면에 띄워지는 순위가 마치 내게 남아있는 경쟁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박하게 달렸다. 수없이 열리는 오프라인 번개 모임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고, 이미 낮에 10km를 넘게 달린 날에도 2, 3등이 따라붙으면 밤늦게 다시 옷을 주워입고 밖으로 나갔다. 러닝 말고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았지만, 우선순위에서 제쳐두고 무조건 뛰었다. 그렇게 지난달에 171km를 달렸다. 작년 내내 달린 거리를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긴 거리를 한 달 안에 뛴 셈이다. 결국, 나는 1등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뻤던 순간은 짧았고, 모임은 곧 종료됐다. 다시 제쳐둔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역시 문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빗나간 승부욕을 부린 내가 한심했다. 열심히 뛰어봤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달리기로 도피했다. 러닝이 삶에 주는 의미를 굳이 찾는다면, 나머지 삶에 활력소가 된다는 점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러닝 외에 몰두하는 다른 삶이 있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사람에게 ‘달리기’ 그 자체만으로는 몸이 건강해지는 것 말고 다른 효용은 없다.


‘러닝 모임 1등’에 집착하던 시절도 끝나고, 또 무기력한 하루들이 계속 지나갔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뒹굴며 어느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는 중이었다. 꿈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도깨비가 기차에 탄 승객들을 모두 잠재운 뒤 잡아먹으려 하는데, 그에 맞서 주인공과 동료들이 필사적으로 승객들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의 스승 격으로 나오는 캐릭터는 기차 여덟 칸 중 무려 다섯 칸을 혼자 지켜낸 뒤, 도깨비와 싸우다 결국 쓰러지고 주인공에게 유언을 남긴다.


그는 숨이  끊어질  같은 중에도 힘주어 말했다.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함이 온몸을 짓눌러도 마음을 불태우라고.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발을 멈추고 몸을 웅크려도 흐르는 시간은 멈춰주지 않고, 곁에서 슬퍼해 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장면을 보는데 목이 깍두기가 걸린 것처럼 매워지더니, 이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장르가 ‘액션 소년만화를 보면서 울게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의미 없다고 여기면서도 왜 내가 그토록 뛰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참 오래도록 낙담해 있었다. 사람이 너무 오래 낙담해 있으면 냉소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예전 같으면 열정이 샘솟았을 이야기에도 점점 마음이 동하지 않고, 집중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도 계속 ‘이게 의미가 있을지’를 회의하며 발을 멈춘다. 그런 마음은 쉽게 돌이킬 수 없다. 무의식중으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늪으로 걸어가는 나를 돌려세우고자 뛰었던 것이다. 자꾸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을 불태워서, 심드렁하게 패배를 반복하는 이 상황을 깨줄 승전보 하나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솔직히, 아직 낙담한 상태에서 빠져나왔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마음에 장작과 불쏘시개를 마련하려는 내가 여전히 건재함을 알아주기로 했다. 그럼 조금 덜 낙담하고, 더 오래 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머지 삶에 계속 부딪쳐보려고 한다. 내게 어울리는 목적지를 찾아내고, 너무 힘들면 뛰는 페이스를 조금 늦췄다가도, 이내 다리에 다시 힘을 줘 통통 튀듯 달려 나갈 것이다. 그럼 언젠가 길고 긴 터널 끝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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