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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갈 오늘을 준비한다

한 달의 게으름, 그리고 3,500km의 질문

by 간달프 아저씨

정말 오랜만에,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

나는 일하는 도중 점심시간을 맞춰 나왔고, 친구는 하루 연차를 내어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먼저 점심을 제안한 쪽도 친구였다. 늘 그렇듯, 그는 먼저 다가와 준다.


이 친구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철학과 인문학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마라톤 풀코스에만 1년에 다섯 번 이상 참가하는 운동 마니아 친구이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수영, 러닝, 사이클을 훈련하며 이 모든 것을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단지 꾸준한 것만이 아니라, 늘 좋은 기록까지 내는, 자기 관리에 있어 말 그대로 하이레벨의 삶을 살아내는 친구이다. 나는 그 옆에서 흉내라도 내보려 애쓰는 수습생쯤 될까.


우리는 만나면 늘 조금은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책 이야기, 철학적 질문들, 그리고 훈련에 대한 서로의 관점.

참고로 나도 그의 영향을 받아 수년 째 러닝 훈련을 이어오고 있고, 마라톤 대회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이날도 자연스레 근황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조용히 물었다.


“요즘 뛰어?” 나는 순간 뜨끔했다.

사실, 난 한 달 넘게 러닝화를 신지 못하고 있었다.

바쁘다는 건 사실 핑계였고, 그저 게을렀고, 마음의 근육도 풀려 있었다.

솔직히 말했다. “한 달 동안 못 뛰었어.”

그러자 친구가 되물었다. “왜, 어디 아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좀 게을러졌어. 몸도, 마음도.”

잠시 침묵이 흘렀고, 친구는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 좀 실망이다.”


그 말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가 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다 들어줄 친구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난 작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내일부터 다시 뛰어보려고.”

러닝은 우리에게 단순한 운동은 아니었다.

삶을 열심히 살아내자는 것의 시작이고

각자 하루를 성실하게 성장하겠다는 약속 같은 의미였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물론 늘 가까웠던 건 아니다.

그러다 중년이 되어, 각자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할 시기에 다시 마주쳤고,

비슷한 가치와 신념을 나누며, 철학과 운동, 삶의 방식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됐다.

그날 점심이 끝나갈 무렵, 친구가 말했다.

“딴 말 안 할게. 이 영화 한번 봐. 그럼 다 해결돼.”

그렇게 추천한 영화는 다큐멘터리 한 편.

제목은 『뚜르: 내 생에 최고의 49일』.

그날 밤, 나는 바로 그 영화를 보았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이야기에 주인공은 스물여섯 청년.

그는 희귀 암 말기 판정을 받고, 병원으로부터 3개월 시한부라는 냉정한 말을 듣는다.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그는 병상 대신 진짜 ‘삶’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도전이었다.

바로, ‘투르 드 프랑스’ 전 구간을 자전거로 완주하는 것.

총 거리 3,500km, 49일간의 여정.

자전거 한 대, 캠핑카 한 대, 그리고 자발적으로 모인 동료들과 함께 시작된 그의 마지막 여정은

자전거 정비 문제, 체력의 한계, 숙소 문제, 그리고 암세포와의 전쟁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피레네를 넘고, 알프스를 오른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지만, 동시에 살아있다는 감각에 울컥한다.

그 49일은 그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강하게, 가장 뜨겁게, ‘살아낸 시간’이었다.

그는 결국 3,500km를 완주했고, 1년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영화가 끝난 뒤, 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친구가 왜 이 영화를 아무 말 없이 보라고 했는지,

‘보면 알 거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큰 감정의 파도를 맞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시한부를 선고받았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할까?’

그렇게, 나는 그 청년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내 마지막 마음을 담아 보기로 했다.

그래서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중년의 평범한 가장으로서 짧은 편지를 써보았다.

이 편지를 끝으로, 오늘의 글도 이렇게 마무리한다.


죽음을 앞에 둔 나에게 쓰는 편지


내 머릿속에는 암세포가 있다. 그리고 그 암은 내 몸 곳곳에 자리 잡았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답답한 건,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점점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은 자꾸만 슬퍼진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엄마, 동생, 가족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부터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듯 줄어들기 시작한다.

행복의 양도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암 말기 판정을 받은 40대 후반의 평범한 가장.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계획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속에는 후회가 차오른다.

‘조금만 더 일찍 삶의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그저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머리를 스친다.

만약 신이 다시 기회를 준다면, 나는 하루를 영원처럼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말한다.


"여기까지다. 다만, 남은 시간만큼은 영원처럼 누리고 오너라."


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저 두렵고, 나의 일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외면해 버린다.

그러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삶을 더욱 깊이 껴안는 일이었다.

문뜩 생각해 본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자유의지’가 아니었다.

그분의 가장 위대한 선물은 ‘생명’이었고,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분명히 '영원'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신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고백하면 '영원'은 선물처럼 주어 질 것이다.

그러나 영원이 아닌 끝이 있는 지금의 삶은 신이 우리에게 예고편처럼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기회이다.

그래서 난 지금부터라도 나의 소중한 시간을 아주 잘 써보려고 한다.

일상처럼 일찍 일어나 새벽 공기를 마시고 책을 읽어볼 것이며

내 사람들을 지긋이 한 번 더 바라보고

살며시 한번 더 손을 잡아 주며

따듯하게 한 번 더 불러 줄 것이다.

하나하나 준비해 가자.

나의 죽음이 반드시 슬프기만 할 필요는 없다.

그 안에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랑과 의미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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