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일본 영화를 연속해서 본다면?
겨울이 새롭게 깊어졌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던 푹했던 1월은
처음 작은 돈을 꾼 후 꼬박꼬박 갚다가
점점 액수를 키운 후 냅다 가지고 튀는
사기꾼의 빌드업 과정이었나 보다.
2월이 되자마자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눈과 강추위는 조금만 걸어도 손끝을
얼게 할 정도다. 삿뽀로에도 눈이 많이
쌓였을까? 버스 높이까지 올라가
매달려 있던 빨간색 화살표가 줄지어
있던 오타루로 가던 지방도로가 생각난다.
오타루. 오갱끼데스까. 러브레터.
이렇게 무의식이 꼬리를 물고 뇌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일까. 추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케줄 없는
오후 만지작대던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러브 레터는 시간까지 딱 맞아서
큰 길만 건너면 볼 수 있었다.
옷을 차려입으면서도 이런 건
OTT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으로 외출의 당위성을 찾느라
허우적대기도 했지만 무사히도
5명 정도의 관객만 있는
상영관 의자에 앉게 되었다.
남들 다 본다는 건 죽어도 안 본다는
삐딱한 마음으로 그랬던 것인지
여성스러운 순정 만화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그랬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1999년에 상영되었고
심지어 그 주연배우인 나카야마 미호가
죽었을 정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관심을 갖거나 볼 생각도 없었다는 것은
참 미스터리다라는 생각이 영화 광고와
본 영화 사이의 정적이 흐르는 깜깜한
진공을 채웠다.
퍼펙트 데이즈는 처음에 재난영화인 줄 알고
화면에 추천되는 넷플릭스의 손짓을 수차례
무시했었다. 하지만 숏폼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영화라는 말을 듣고 보게 되었다.
일상이 무너질 만한 일이 아직도 진행 중인
스펙터클한 요즘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도망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단순하고 성의 없는 반복이 아닌가 하는
혹평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목구멍 위로
기어 올라와 혀와 합체가 되려는 순간마다
히라야마가 카세트 테이프를 청소차 플레이어에
쑤셔 넣어 주었다. 그 테이프는 나의 귓구멍으로
60년대의 올드팝을 분사해 주었고 달궈진 혀를
충분히 식혀 주고도 남았다.
대사보다는 영상과 음악과 소리로 채워진
퍼펙트 데이즈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프리킥을
차고 있었다. 아름다운 궤적을 이루며 휘어들어가는
골이었다.
두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러브 레터의 첫 도입부에서 똑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와타나베와 이츠키가 혹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동일인인가 하는 혼돈을
일으켰다. 거기다 이츠키라는 이름이 같은
남학생과 여학생이라니 내 머리는
뒤죽박죽 되어 포기 직전까지 같다.
와타나베와 이츠키의 편지형식으로 진행되면서
회상하는 장면이 많아 편지 내용과 추억들로
텍스트와 대사가 영화를 꽉 채웠다.
와타나베가 오타루의 설산을 향해서
죽은 그의 약혼자 이츠키를 완전히
떠나보내는 자신만의 장례식을 치르는
가장 유명한 장면도 오겡끼데스까라고
애타게 외치는 대사로 압축된다.
죽은 사람에게 건강합니까 또는 잘 있나요?
나는 잘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이 만드는 부조화가
더욱 그 사랑과 그리운 마음을 애절하게 한다.
그에 비해 퍼펙트 데이즈는 이해가 필요
없는 영화다. 똑같은 매일의 일상이 반복된다.
그리고 말이 없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첫 대사를
듣기까지 한참이 걸린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공공근로로 청소를 하는 것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매일의 일상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이해하지
않고 공감하게 된다. 또한 혼자 사는 오십 대의
중년 남자가 혼자 지내며 출근하고 공공 화장실
청소를 하고 퇴근해서는 목욕을 한다. 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 어떤 회상 장면도
없으며 현재의 시점으로 시간이 흐른다.
지금 강을 따라 바다로 가보자는 조카딸의
제안을 다음에 가자고 거절하며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다’라고 두세 번 말로 그리고
엉터리 노래로 반복하는 대사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 대신 영화를 채우는 소리는 매우 다양하다.
기상해서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 날마다
자판기에서 뽑는 커피 캔 떨어지는 소리,
자동차 선반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골라내고
플레이어에 꼽는 소리, 청소하는 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로 영화는
꽉 채워져 있다. 그중 가장 도드라지는 소리는
그가 좋아하는 60년대 올드팝이다. 엔딩을
장식하는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은
아침 햇살에 빛나는 그의 표정과 함께
대단한 여운을 남긴다.
두 영화가 비슷한 면도 있다. 둘 다 마지막에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는 것이다. 러브레터의 경우
오겡끼데스까 장면은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영화를 보지 않은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장면이었다.
그래서 아 이런 감정으로 저 장면이 펼쳐지는구나 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진 않았다. 첫사랑이라는 그
정의할 수 없는 일방적인 감정이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첫사랑과의 마지막 만남을 추억하게
하는 방아쇠가 당겨지며 감정을 격발 시킨다.
첫사랑이 주고 떠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번역된 책 뒷면 도서 카드의 또 뒷면에 그려진
이츠키의 초상화가 화면을 가득 메우게 되는
것이다. 그 남학생은 이름이 같은 여학생의
이름을 수없이 적었던 것이며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책의 뒷면, 도서 카드의 뒷면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표현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사이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찔끔 눈물이 났다.
자리를 뜨면서도 멍해져서 두르고 왔던
목도리를 놓고 나가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
가 찾아오기도 했다.
퍼펙트 데이즈의 엔딩장면은 위에서 말한
대로 feeling good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야쿠쇼 코지의 슬픈 웃음 속에서 굉장한
떨림을 준다.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new life for me!
일상의 시작을 위해 집을 나서는 쪽문을
열면서 그는 늘 하늘과 나무를 보며
코로 숨을 힘껏 들이마신 후 빙그레 웃는다.
새로운 날을 온몸으로 감사하며
행복의 미소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인다.
그 이유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쉰 살은 넘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두 영화를 이어서 편집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산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이츠키가 사실은 극적으로 구조된다.
하지만 첫사랑의 기억만 남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으며 실어증에 걸린다.
그리고 히라야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엔딩 장면에 웃는 얼굴에
붉은 흰자위 위에 어린 눈물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엔딩곡은 Blood, sweat & tears의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가
되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