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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 무한 날이 있나요?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나는 날이 있나요?

by 단단지

나에게 연차란 무슨 일이 있어야 쓰는 도구다.


무슨 일이라 함은 여행일 수 있고, 병원이나 관공서 같은 개인 업무일 수도 있고 무조건 휴가에 가능한 무언가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아무 일 없이 연차를 쓴다. 회사의 연차 소멸 공지에 따른 사용 권장 공지를 보고 난 후 나는 거진 매주 하루씩 쉬고 있다.


오랜만에 아무런 계획 없이 쉬다 보니 뭘 해야 할지 잔뜩 계획을 세운다. 생각으로만 계획하면 분명 ‘뭘 하려 했더라?’라고 뻔히 보이기에 카카오톡 속 나에게 카톡을 보낸다.


소성주 사기, 병원 가기, 다이소에서 깔창 사기, 겨울나기 양말 구매.


그렇게 아내가 출근하고 넓어진 침대 위에서 혼자 9시께 눈을 떴다. 그러곤 어제 계획한 카톡은 가볍게 잊은 채 생각한다. ‘아 엄마한테 가서 점심먹자고 하면서 효자 노릇이나 할까? 가면 엄마가 좋아하겠지? 아 그런데 오늘 흰옷 빨래도 해야 하고 겸사 시간 날 때 청소기도 직접 돌리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연차니까 조금 더 누워있어 볼까?’라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2시간이 지났다. 11시경이 됐고 배가 고팠다. 그렇게 집안일의 계획을 짠 자상한 남편과 효자가 되고 싶었던 김훈기는 없어지고 배고픈 김훈기만 남아있다.


배고픈 나는 더 말이 많아진다. 누군가와 대화를 안 하니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시작한다. ‘아 와이가 안 가주는 인도 카레 집에 가서 1인 세트를 먹을까? 그리고나서 소화 겸 나이키 걸어가서 옷 구경이나 할까? 그런 다음 어제 정해둔 계획들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라고 꼬꼬무한 생각을 하면서 부엌으로 나온다. 막상 부엌으로 나오니 굳이굳이 돈을 써서 밥을 먹지 말고 라면이나 끊이면서 집안일이나 하자는 소박한 나로 변해버린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만 한가득 하다가 그날의 연차는 마무리됐다. 오랜만에 집으로 가져온 업무도 없었고, 오랜만에 뜬금없이 쉰 날이라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하철에서 이번 주의 글감을 생각하던 중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평소 항상 온라인 되어야 하는 업무를 하고 있어 무언가 계속 불안해하고 터지면 해결해야 한다는 곤두섬을 달고 살았다. 업의 특성상 즉각 대처해두지 않으면 스노우볼이 굴러 커지는 경우가 많아 생긴 직업병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날을 되돌아보니 참, 한없이 평화로 웠다. 꼬꼬무한 생각만으로 하루를 계획적인 것인지 의식의 흐름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는 무언가로 보냈다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주말에 뭐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난 늘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서 지루함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 지루함을 느꼈다는 것 자체를 자각하고 만족해하고 싶다"고 말이다.


오랜만에 비슷한 감성을 느끼니 깨나 기분 좋았다. 주말의 당연한 휴식과 달리 갑자기 금일봉처럼 떨어진 이 평화로움이 더욱 달콤했다. 쉬는 날이라도 일이 터지면 마음 편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나보다.


매일 치열하고 알차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집에 오면 운동과 공부와 무언가에 대한 고민은 쿨하게 내려놓는다. 그러곤 멍하니 유튜브를 보거나 느끼는 바 없는 스낵류 게임만 하는 요즘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놓고 하루가 주어지니 나름 꼬꼬무 하며 알차게 보냈다.


그날도 평소처럼 꼬꼬무한 생각으로 가득 채웠지만 왜인지 마음이 편하다. 평소 하던 생각들은 뭔가 압박을 주고 지키지 못해 스스로 한심해하는 성찰의 반복이었다. 이를테면 '운동해야 살 빠질 텐데, 아 그런데 오늘은 잘래' '부업 공부해야 하는데, 아 귀찮아서 못 했네' 같은 것이 있겠다.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무언가 근심이나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차 스트레스받을 때는 그냥 집 가거나 잠을 자라고. 그날의 연차는 그렇게 갑자기 잠을 자버리거나 집으로 가버린 그런 날이었다. 앞으로는 스위치를 잠시 끄는 여유를 좀 더 만들어 보리라.


아무튼 그렇게 나는 지하철에서 그날의 지루함과 꼬꼬무함을 떠올리며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곤 곧이어 뜬금없는 날을 골라 연차를 올렸다. 이 글을 보는 분들도 가능하시다면 여유 날 때 아무 이유 없이 쉬어 보시라. 물론 그 쉬는 날은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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